INSIGHT
북 큐레이션: 부유하는 말(들)
by 김소희, 황선애 (상업화랑 전시기획팀)

우리는 정의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여러 말들이 떠돌아 다니는 가운데, 이 책들을 통하여 '지금'의 조각들을 맞춰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읽을거리들을 골라 보았습니다. 상업화랑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전시 《지금은 과거가 될 수 있을까(The Continuous Present)》와 함께 보시면 더 좋답니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안규철 역,

『진실의 색 : 미술분야의 다큐멘터리즘((Die Farbe der Wahrheit: Dokumentarismen im Kunstfeld)』, 워크룸프레스, 2019. 

(김소희)

“지속적인 불확실성,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와 일치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인정해서는 안 될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 특성이다.”

현실이 가상화됨을 넘어, 가상이 현실화되는 오늘날 다큐멘터리(혹은 다큐멘터리 이미지)는 어떤 지위를 갖는가? 히토 슈타이얼은 다큐멘터리가 처한 존재론적 위기로부터 출발하여 그 “확고부동한 불확실성” 위에서 창조적 가능성을 찾는다. 아카이브와 기억의 정치, 벤야민과 아감벤, 정신분석학 등 방대한 지식을 경유하여 지도 그려지는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존재론은 현실을 이루는 다중의 진실을 표상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 오윤성 역,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 아우슈비츠에서 온 네 장의 사진 (Images Malgré Tout)』, 레베카, 2017. 

(김소희)

‘상상이 찢긴 시대’에 취약하고 불충분한 이미지가 지닌 잠재적 역능에 대한 사유.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아우슈비츠에서 찍힌 흐릿한 네 장의 사진으로부터 역사의 실재를 증언하는 이미지의 저항적 가능성을 건져낸다. 그에게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적 비극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을 뿐’인 것이며, 그로부터 잔존하는 이미지를 연구하는 일은 사유가 중단된 곳에서 끈질기게 사유하는 행위다. 우리는 답을 찾지 못한 역사적 조건들의 힘, 즉 모든 것(le tout)을 무릅쓰고(le margré), “기억하기 위해”, “알기 위해 스스로 상상해야만 한다.”





박준상, 『바깥에서 : 모리스 블랑쇼와 ‘그 누구’인가의 목소리』, 그린비, 2014. 

(김소희)

자크 데리다, 장 뤽-낭시, 에마뉘엘 레비나스 등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모리스 블랑쇼의 시적 언어와 철학을 소개하는 해설서.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죽음과 상실의 경험, 즉 ‘바깥의 경험’으로 연결 짓는 그의 사유는 절망과 고통의 시대에 인간 존재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시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죽음은 비로소 타인을 향해 존재할 가능성을, 관계 가운데 형성되는 실존의 가능성을 발견토록 한다. 바깥의 경험 내에서 함께-있음은 ‘우리’의 장소, ‘공동체 없는 공동체’의 장소를 열어젖힌다.





무라카미 하루키, 김춘미 역, 『해변의 카프카 상, 하』, 문학사상사, 2002. 

(황선애)

현실 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넘나들며 ‘지금’을 이야기하는 소설. 소설 속 인물들은 ‘그때’의 기억 혹은 망각이 서로 뒤섞인 채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현실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있음’, ‘있었음’으로 지위를 가지며 영속한다. 즉 망각의 존재 자체가 기억의 존재와 같이 무언가의 빈 공간을 나타내는 흔적이며 존재했던 그 자체가 된다. “세계는 메타포야”라는 오시마의 말처럼 미래는 예상을 달리한다. 그러니 현실이 내 뜻 같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볼프강 보르헤르트, 김주연 역, 『이별 없는 세대(Generation ohne abschied)』, 문학과지성사, 2018. 

(황선애)

1947년 26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과 이별을 한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유작. 그가 글을 쓴 것은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보낸 시간이 전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다. 한 줄기의 햇살과 흙 내음, 씨앗의 생명력, 눈 덮인 나뭇가지 등 따뜻한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인간의 삶과 행동 사이를 섬세하게 이어가고 묘사한다. 이처럼 그는 전쟁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으며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지금 우리 또한 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르며 암울하고 단절된 삶을 보내고 있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 일상적인 삶이 낯설게 되었다. 마치 이전 세대와 이별한 듯.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세대를 맞이했다. 과거의 시간은 가슴 한편에 새겨두며 새로운 미래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