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한 달간 진행된 리소딴(lisottan)의 기획전 《연기와 연기》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리소딴’은 송유나, 윤혜린, 최지원 작가가 결성한 전시 기획 그룹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장기적인 플랫폼 형성을 위한 첫 시작을 알렸다. 서로 다른 물성과 이미지를 지닌 세 작가의 작품이 한 공간에 놓이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전시에 대한 소회를 들으며 리소딴이 지향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연기와 연기》1층 전시전경
Q. ‘리소딴’의 구성원인 세 작가분의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윤혜린(이하 윤)
안녕하세요. 윤혜린이라고 합니다. 회화작업을 주로 하고 있고, 자연의 비정형적 형태와 조형적 관계에 관심을 두며 일상에서 수집한 자연의 형태에 빗대어 내적 심상이 담긴 은유적 풍경을 그립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들을 쫓아 읽어내기를 멈추고, 마주한 내면의 풍경을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송유나(이하 송)
안녕하세요. 송유나라고 합니다. 저는 평소 경험이나 생각을 조각 또는 설치로 풀어내며 신체와 관련된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몸 위에 떠다니는 의미나 형상에 관심을 두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예술의 도구가 되는 예술, 예술의 배경이 되는 예술을 만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최지원(이하 최)
안녕하세요. 저는 최지원이고요, 빈티지 도자기 인형을 소재로 평면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 2020년 5월에 디스위켄드룸(This Weekend Room)이라는 공간에서 《Cold Flame》이라는 타이틀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새로운 신작들을 선보이는 중입니다. 도자기의 매끄러운 질감과 가시나 불꽃 등 다른 결의 질감을 한 화면에 배치하여, 상충하는 촉각성에 집중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리소딴은 어떻게 결성된 그룹인가요? 그룹의 정체성, 혹은 지향점을 나타내는 그룹명 ‘리소딴’을 선택하시게 된 이유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최) 먼저 저희 셋의 만남은 대학원 수업에서 시작되었어요. 윤혜린 작가와 저는 서양화 전공, 송유나 작가는 조소 전공인데 학번도 다르고 작업의 결도 다르지만 합이 굉장히 잘 맞았어요. 그래서 신진 작가이자 학생으로서 함께 전시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금 공모에 지원했습니다.
리소딴이라는 이름 자체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셨는데요, 먼저 ‘리소(liso)’는 스페인어로 ‘평평한, 매끄러운, 구김살이 없는’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여기에 단체라는 뜻의 ‘딴’을 더해 이러한 정체성을 지향하는 그룹, ‘리소딴’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어요. 번외로는, 저희가 한 번 회의를 시작하면 이야기가 끝없이 뻗어 나가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미 없는 딴소리일 수도 있는데, 저희는 그런 수많은 대화와 공감, 소통을 통해 결합이 잘되었던 것 같아요. ‘딴소리’를 거꾸로 하면 ‘리소딴’이 되기도 하는데요, 이런 이름이 저희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유의미한 딴소리들의 합’이라고 할 수 있죠.
《연기와 연기》2층 전시전경
이번 전시에서 상업화랑(을지로)의 공간적 특성을 활용한 창의적인 디스플레이가 인상 깊었습니다. 공간 본연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전혀 다른 곳으로 탈바꿈 시킨 느낌이었는데요. 설치과정에서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셨는지, 서로를 돋보이게 해주었던 각 작품의 설치 방식이 내용과는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 궁금합니다.
송) 초기 기획단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몇 가지 단어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물리적 메타포’예요. 공동작업한 소설 속에 나오는 세 인물이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고 관계를 잘 맺지 못하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감정을 나누기 시작하잖아요. 1층에서는 초반의 관계가, 2층에서는 후반의 관계가 잘 드러나길 바랐어요. 특히 상업화랑 2층의 낮은 천장, 나무 벽과 같은 요소들을 활용하면 저희가 상상한 아늑한 공간을 구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연출하고자 했어요. 동시에 세 작가, 세 작품의 페르소나가 연극 무대에 있는 인물들처럼 마주하는 느낌, 광장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다 보니 빈백, 분수 등의 요소들이 놓이게 되었고, 조명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서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연극적인 느낌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1층에 있는 제 작품 <애무하는 공간>은 원래 ‘애무하는 조각’이라는 아이디어로 시작되었어요. 조각을 하는 의미에 대해 고민하던 중, 특정한 목적성을 부여하면 작업의 이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공간을 유희하고 애무하는 조각을 떠올리며 벽면을 훑거나 만지는 모션이 있는 조각을 구상했는데요, 이후 벽면으로 구획된 비어있는 공간 자체를 유희하는 설치물, 작품을 어루만지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설치물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발전되었어요. 그리고 상업화랑 공간과의 자연스러운 융화를 위해 합판을 재료로 선택하게 되었어요. 흥미로웠던 점은 관객 분들이 벽면의 어떤 부분이 작품인지 궁금해 하시거나, 9번 작품(<애무하는 공간>)은 어디에 있냐고 물으시는 거였어요. 제 설치물이 의도했던 것처럼 배경으로 잘 녹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유나, <애무하는 공간>, 316x296x60cm, 합판, 2021
송유나, <눈물을 닦아주는 조각>, 61x13x7cm, 모터, 아크릴, 2021
최지원, <Bloodshot>, 45.5x45.5cm, 캔버스에 유채, 2020
상업화랑을 전시 공간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최) 상업화랑에 처음 방문한 건 안경수 작가님의 개인전 때인데, 나무 합판으로 이루어진 다각형 공간에 그림이 합쳐졌을 때 나오는 느낌이 굉장히 따뜻하고 좋았어요. 그래서 상업화랑을 오가며 이곳에서 저희 기획을 실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 넓은 공간의 화이트 큐브보다는 저희 전시의 따뜻한 요소를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고민하다 보니 상업화랑을 선택하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전시를 구상하던 당시에는 상업화랑이 1층만 있는 공간이었는데, 중간에 2층이 새로 생기면서 더 좋은 방향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세 작가의 각 작품이 서로 다른 물성과 이미지를 가지고 어우러졌다면, 함께 공동 작업한 기획소설 『연기와 연기』는 하나의 사건을 담은 짧은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동 작업을 소설이라는 형태로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또한 전시의 제목이자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연기와 연기’는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윤) 작가 셋이 회의를 하다 보면 작업과 근황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부터, 최근에 본 전시, 동시대 예술계 상황과 같은 큰 이야기까지 뻗어 나가게 됩니다. 모여서 10시간씩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어요.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이 소설을 만들어 가는 데에 중요한 베이스가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소설을 만들기 전에 서로를 알아가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깃거리들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이를 정리된 글로 옮겨서 각자의 작품이 하나의 소설 안에서 만나는 형태로 공동 작업을 했고, 소설과 각각의 작업을 함께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았어요.
제목 ‘연기와 연기’는 소설의 시작과 끝이 연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착안했습니다. 연기와 연기가 섞일 때는 구분 선 없이 섞이잖아요. 세 작가가 전시를 기획할 때 서로 섞이며 연결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리소딴,『연기와 연기』
세 작가님이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각각의 작품이 일종의 페르소나로서 참여했다는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소설 『연기와 연기』 속 세 명의 인물이 그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것 또한 재미있는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격화된 작품과 소설의 등장인물, 즉 세 페르소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소설 속 삐걱거리는 세 인물의 공통분모가 되는 ‘죽음과 결핍’이 세 작가의 공통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윤) 소설 속 인물은 작품의 부분이고, 작품은 작가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 인물이 결국 작가의 부분, 즉 페르소나가 되는 것인데, 말씀해주신 세 인물의 공통분모가 되는 죽음과 결핍이 세 작가의 공통점이자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라고 보았어요. 우리 모두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죽음을 근처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인격화된 작품인 세 페르소나 역시 보통의 현대인들답게 살아가리라 생각해요.
죽음에 대한 특별한 경험보다는 도처에 있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말씀인가요?
윤) 네 맞아요. 소설을 읽으신 관객 분들이 너무 희망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아서 더 좋았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했어요. 진짜 평범한 이야기가 된 거죠. 그리고 저희는 나름대로 소설의 세 등장인물과 작가를 매칭하며 썼는데, 읽는 분마다 해석이 달라서 그런 부분을 지켜보는 과정 또한 재미있었어요.
리소딴의 이번 전시와 같이, 최근 들어 여러 작가들이 협력하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술계의 동향 가운데 리소딴은 어떤 연대 형식을 지향하나요? 소설 속 인물이 “대화의 끝에서 온전히 이해할 순 없을지라도 흐릿하게나마 서로를 연대”한다는 설명이 하나의 비유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최) 저희 주변에서도 작가 분들끼리 힘을 모아 하나의 결과물을 일구어 나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정말 좋은 양상 같아요. 특히 이제 막 시작하려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서로를 서포트 해줄 수 있는 환경이나 소속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저희 세 명도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리소딴은 어떤 연대 형식을 지향하는지 질문해 주셨는데요, 저희는 연기와 같은 연대를 희망합니다. 앞서 윤혜린 작가가 말해주었듯, 연기는 뚜렷한 경계선이나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저희 셋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주는 한에서,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혜린, <오랜만에>, 97x193.9cm, 캔버스에 유채, 2020
전시에 많은 관람객이 방문해주셨습니다. 각자 전시(준비과정 또는 진행 과정)에 대한 소회를 말씀해주신다면?
윤) 원래는 작년에 이 전시를 할 계획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준비 기간이 길어졌어요. 일 년 넘게 기획하는 과정을 거친 뒤 전시를 열게 된 거죠. 불행 중 다행으로 그만큼 더 밀도 있는 전시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관람객들이 저희가 노력한 부분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사실 기획과 관련된 경험은 전무한 작가들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기도 했어요. 시각예술 작가이다 보니 문학이 결합된 형태의 전시를 만드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고요. 하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이 밑바탕에 있어서 가능했던 전시라고 생각해요. 이 자리를 빌려 두 작가 분께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 물론 긴 시간 동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서로 배려해주었기 때문에 큰 고비는 없었어요. 0에서 시작해서 하나씩 채워나가며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고, 앞으로의 작업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일을 해주시는 기획자분들의 역할을 실감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대학원 졸업 후 필드에서 작가로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공동체가 좋은 기반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는 지금의 송유나 윤혜린 최지원이라 만들 수 있었던 결과물인 것 같아요. 10년 뒤에는 더 성숙해진 만큼 이런 느낌의 전시가 나오기 어렵겠죠? 그런 점이 좋다고 생각해요.
송) 두 분께서 잘 말씀해주셨는데, 저 역시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팀원들에게 고마운 점을 말해보자면, 사실 설치 작업이 가장 변수가 많아요. 만들 때도 그렇지만 설치할 때는 더욱 그렇거든요. 그런데도 묵묵히 기다려준 두 작가와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특히 1층의 벽면 설치와 2층의 분수가 공간에 무리를 주지 않을까 걱정되었는데, 상업화랑 대표님께서 흔쾌히 설치를 허락해주셨어요. 그런 자유도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지원, <뾰족한 것들의 방해4>, 90.9x72.1cm, 캔버스에 유채, 2021 (왼)
최지원, <Eclipse>, 80.3x116.8cm, 캔버스에 유채, 2020 (오)
전시 기획 그룹 ‘리소딴’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무엇인가요?
송) 전시가 끝난 뒤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저희끼리 전시에 대한 소회를 나누는 시간도 가진 후에 좀 더 재미있는 기획을 들고 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윤) 상업화랑에서 외부 기획을 받아 전시를 진행한 게 두 번째라고 들었어요. 이 공간에 저희의 전시를 보러 오신 분들은 상업화랑에 대해 더 알게 되고, 상업화랑을 원래 방문해주시던 관객 분들 또한 저희 전시를 접하면서 서로 좋은 시너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공간과 기획자, 작가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기회를 많이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김소희 (상업화랑 전시기획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