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가 주된 것이 될 때, 카탈로그는 전시가 될 수 있습니다."
(When information is primary, the catalogue can become the exhibition.)
- Seth Siegelaub, 1969.
"전자복사술(Xerography) –모든 사람의 두뇌도둑이라고 일컬어지는– 은 즉석 출판(instant publishing) 시대를 예고한다. 이제는 누구나 저자와 발행자가 될 수 있다. 어떤 내용의 어떤 책이든 집어 들고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씩 복사하여 자기 책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Marshall MacLuhan & Quentin Fiore, The Medium is the Massage, 1967.
image of Artists' Books (출처: printedmatter.org/about/artist-book)
미술과 출판의 접점에서
아트 딜러 세스 시겔롭(Seth Siegelaub, 1941-2013)은 1960년대에 '카탈로그 전시‘와 ’책 전시‘를 고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미술과 출판을 잇는 흥미로운 연결고리로 보이는데, 이처럼 출판이 전시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미술과 출판이 만나는 자리에서, 어떤 출판은 예술의 직접적 매개체로 받아들여진다. 미술 작업으로서의 책 혹은 전시로서의 책이 등장한다(혹은 도록이지만 단지 기록물 이상의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때의 출판은 반드시 잘 제본된 ‘책’이 아닐 수도 있다. 지극히 느슨한 형태의 카드 모음집도 가능하다. 별다른 대중성을 갖추지 않은 사소한 주제에 관한 정기간행물도 가능하다. 출판물은 반드시 인쇄물일 필요도 없으며 웹 공간과 종이를 오가기도 한다(의도적으로 인쇄물이기를 선택하기도 하며, 인쇄물이었다가 웹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대형 출판사, 전문 편집자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뭔가 다른 책’들은 인터넷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예술인과 힙스터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사물이자 실천적인 생산수단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국내에서 소규모 예술 출판물을 위한 직거래 장터로 출발한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 서울 아트 북 페어)’은 10주년에 접어들었으며, 점차 그 방문객의 수를 확대해 왔다(2020년에는 웹을 통해서만 행사가 이루어졌는데, 판매 오픈 직후 웹사이트의 속도가 느려질 정도로 동시접속자의 수가 굉장히 많았다). 최근 아트선재센터에서 “아시아에서의 소규모 출판 단위들을 다루는” 아카이브 전시 《방법으로서의 출판》이 열려 이러한 문화에 관한 총체적인 시각을 제공하기도 했다(link).
이러한 문화의 소비자(이자 단 한 번의 생산자)였던 필자는 미술사에서 그 시작점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작업으로서 혹은 지하 출판물로서 ‘뭔가 다른 책’을 만들어온 역사가 생각보다도 더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이러한 문화의 출발점을 말하려면 20세기 초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로, 혹은 그 이전으로까지 되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세스 시겔롭은 엄밀히 말하자면 ‘출발점’에 있는 인물은 아니다(자신이 무엇인가의 출발점이라고 계속 주장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그는 미술사와 얽혀 있는 대안적 출판 역사의 한복판에 있다. 보기에 따라 중심점일 수도, 그저 중간지점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활동한 1960년대 후반은 어떠한 폭발적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였다.
시겔롭은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뉴욕의 화상(아트 딜러)이었으며 1960년대 개념미술의 태동기에 중심에 있었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매체환경과 더불어 당대의 미술이 완전히 새로워지고 있다는 데 동의했으며, 전시의 형식과 미술작품의 판매 형식까지도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념미술의 뛰어난 마케터였던 그는 개념적 작품에서 작가의 권리를 찾는 데 앞장섰으며, 미술이 ‘개념’이 될 때 미술계를 둘러싼 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지를 주시하였다. 이러한 기업가적 면모는 그를 ‘아방가르드의 화신’으로 정의할 수 없게 한다. 시겔롭의 관심사는 넓고 다양했다. 독립큐레이터의 초창기 모델 중 하나로 유명하지만 1971년경에는 미술계를 떠났고, 미디어 이론 출판사를 운영하거나 직물(textile)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Seth Siegelaub (1941-2013) (monoskop.org/Seth_Siegelaub)
제록스 북
시겔롭이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동안(주로 1968-1969년)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대부분 ‘출판’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전시와 관련한 출판의 위상을 어떤 식으로든 격상시켰는데, 가장 급진적인 경우에 출판은 전시를 완전히 대체했다. 개념미술 작가들의 ‘그룹 전시’인 『제록스 북(Xerox Book)』(1968)에서, 시겔롭이 주목한 방법론은 ‘제록스 복사기’를 통한 개념적 미술의 기계적 생산과 확산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매클루언(Marshall McLuhan)과 피오레는 복사를 손쉽게 만든 전자복사 기술이 출판의 위상과 속도를 변화시킬 것임을 예견했다.
『제록스 북』은 복사(기)라는 매체 자체에 주목하는 기획이었다. 칼 안드레, 로버트 배리, 솔 르윗, 조셉 코수스와 같은 유명한 작가들이 참여한 이 ‘책-전시’에서, 그들의 작업이 각각 25페이지씩의 같은 분량을 점유하며 같은 매체와 방식으로 표현됨에 따라 개인의 미적 ‘개성’은 성공적으로 제거되었다. 대신 전시의 형식과 매체, 방법을 결정한 기획자 시겔롭의 존재감이 부각되었다.
‘미술’을 ‘언어’와 일치시킨 1960년대 개념미술이 회화나 조각 대신 출판을 매체로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미술은 스스로를 정보(information)라 칭하며, ‘미술특정적’ 매체에서 벗어나 보다 저렴하고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 옮겨갔다. 시겔롭은 책-전시의 핵심요소로 접근가능성의 확대를 꼽았다. 새로운 미술은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전시가 될 필요가 없었으며, 그저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오늘날의 언어로 모바일(mobile) 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클루언의 용어를 빌리자면, ‘즉석 출판(instant publishing) 시대’의 소규모 예술 출판은 당대성을 드러낼 중요한 매체로 제시되었다. 시겔롭은 이러한 이상을 비평가 루시 리파드(Lucy Lippard), 작가 솔 르윗(Sol LeWitt) 등 1970년대 예술 출판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part of Xerox Book (1968)
(1) Title, (2) work by Sol LeWitt, (3) Joseph Kosuth, (4) Lawrence Weiner.
(출처: MoMA)
오늘날, 제록스 북의 존재방식은 이상하게 이중적이다. 필자는 웹 pdf를 통해 제록스 북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접할 수 있었다. 이 pdf 파일은 누구나 열람 및 다운로드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종이 책으로서의 제록스 북은 1960년대 개념미술에 관한 대표적인 수집품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아래의 링크를 보자.)
(1) https://primaryinformation.org/pdfs/seth-siegelaub-online-archive/
시겔롭의 출판물 다수를 pdf로 열람할 수 있는 웹사이트(무료).
https://ubu.com/aspen/aspen5and6/index.html
비슷한 시기의 사례로, 1965-1971년 동안 실험적인 '멀티미디어 박스' 형태로 발간되었던 Aspen 매거진 또한 웹 아카이브가 제공된다.
(2) https://www.printedmatter.org/catalog/3607
한편, 현재 절판 상태인 제록스 북의 오리지널 프린트는 $4,750에 판매되었었다.
https://www.printedmatter.org/catalog/27801
2010년 버전의 카피본은 다시 $80에 판매되고 있다.
제록스 북의 이중적인 상태는 시겔롭이 남긴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1) 먼저, 그가 제안한 ‘책 전시’와 ‘카탈로그 전시’의 방법론을 동시대에 적용한다면 웹 퍼블리싱의 전략과 유사하며, 확산가능성이라는 키워드는 오늘날의 ‘온라인 전시’를 떠올리게 한다. (2) 그러나 제록스 북은 그저 온라인 전시로만 치환되지 못했다. 프린트된 제록스 북은 여전히 역사성을 지닌 물질로서, 수집품으로서 여전히 무언가 만지고 싶어 하는 우리의 속성을 보여준다. 출판-전시의 전략은 ‘미술특정적’ 매체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지만 제록스 북은 결국 미술 수집품으로서의 특수성을 지닌 책이 되었다. 보통의 책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제록스 북으로부터 많은 시간을 지나 온 오늘날, 미술계에서 예술 출판의 수요는 높아졌고 소규모 책방과 매니아층이 증가했으며, 어떤 면에서 안정된 하나의 방법론이 된 것처럼 보인다. 사실 미술과 출판의 특수한 접점에서는 ‘보통의 책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무언가’가 여전히 중요하다(‘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라는 수식이 붙거나 붙지 않더라도). 그것이 생산방식이든 유통방식이든 형식이든 내용이든, 뭔가 다른 출판물은 오늘의 예술과 ‘힙스터’ 인구 사이를 중개하고 있다.
글 김명진
*이 글은 필자가 현재 작성 중인 석사 논문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조금 다른 서술방식으로 전개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