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GSAN
강규건 Solo Exhibition
《The Third Light》
12. October - 3. November 2024
빛이 있으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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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로 시작하는 모든 신화와 경전은 세계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떤 세계는 신이 어두운 물 속으로 뛰어들어 최초의 땅을 건져 올림으로써 세워졌고, 어떤 세계는 신이 ‘무(無)’로부터 우주를 빚어내 만들어졌으며, 또 다른 어떤 세계는 한 개의 부화한 알로부터 발생했다.[2] 그리고 어떤 세계는… 국가와 민족, 인종, 종교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세계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창조신화는 구약성서의 창세기다. 창세기에 따르면, 빛은 하나님에 의해 세계의 첫째 날 탄생했다. 이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데, 창세기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창조 신화 속에서 빛은 만물의 근원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데에 있어 빛은 불가결하기에, 그 시초를 묻는 질문의 끝에는 자연스럽게 빛이 있었다. 그러나 신비롭고 영적인 존재에 가까웠던 태고의 빛은 인류의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신화에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미신에서 하나의 기술로 자리잡는다. 지난날 인류가 갈망했던 머나먼 빛은 오늘날 우리의 도시와 집으로, 주머니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광원-태양 아래 존재하던 세상은 이제 두번째 빛, 자연의 빛을 모방한 인공광으로 가득하다. 빛은 아우라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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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근원과 창조에 얽혀 있던 빛은 과연 그로부터 멀어졌을까? 빛은 더이상 인간의 실존에 관여하지 않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 여전히 어떤 의미를 배태할 수 있다면 – 빛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 앞에 출현하는가?
강규건은 이번 전시에서 세개의 빛을 통해 이러한 물음에 응한다. 그는 과거 많은 이들이 거쳐 왔고, 현재 자신이 마주하는 빛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제 1의 빛, 이를 기술적으로 모방하여 만들어진 제 2의 빛이 있다. 제 2의 빛으로서 인공광은 자연의 빛에 의존하여 가까운 존재를 가늠하던 세계를 정보통신망에 기반한 초연결 세계로 이끌었지만, 그로 인한 피로와 불안을 야기하기도 했다. 지지 않는 빛(들)은 과거와 다르게 흔해 빠진 무언가가 되었고, 그만큼 인간의 삶에 보다 깊숙이 침투했다. 빛을 통해 “어디에도 존재하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3]의 초상은 강규건의 그림에서 어둑한 밤 풍경을 부유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실재하는 어둠 속 빛과 인물을 충실히 재현하는 형식의 작업으로 얼마간 지속되었고, 현실을 모방한 많은 그림의 선상에 놓였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보자. 주지하듯 모방은 날줄로 놓인 회화의 역사에서 화가에게 주어진 오랜 과업이었다. 3차원 세계를 2차원 표면에 모방하기 위한 화가들의 노력은 회화사에 여러 획을 남겼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빛이 실재하는 세계의 창조 뿐 아니라 캔버스 위의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빛에 의한 밝음과 어두움, 즉 명암은 현실의 모방을 위한 필수 기법이다.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래 명암법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무수한 화가들에 의해 활용되었다.[4] 특히 키아로스쿠로의 대가라 불리는 카라바조는 “회화는 빛”이라 말하며 회화에서 빛이 점하는 중요성을 역설했다.[5] 모방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았던 시대 이후에도, 빛은 회화사 안에서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인류의 역사와 신화, 회화의 역사와 모방, 그 모든 곳에 자리하는 빛. 다시 지난 이야기에서 돌아와 강규건의 마지막 세번째 빛, ‘제 3의 빛’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그가 사는 동시대, 화가로서 고민해온 회화의 당위성은 기나긴 이야기를 거쳐 여기에 당도했다. 제 3의 빛이란 그가 캔버스에 구현한 또 다른 빛, 오직 그림 안에서만 현현하는 빛을 의미한다. 가까운 과거의 그가 옛 화가와 다름없이 ‘모방하는 자’로서 그림에 접근했다면, 현재의 그는 ‘창조하는 자’로서 실재하지 않는 빛을 그림에 그려 넣는다. 인물의 얼굴을 전부 가릴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빛, 캔버스의 넓은 면적을 가로지르며 밝게 타오르는 빛, 그림 바깥의 광원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 강규건은 현실에는 없지만 그림에는 있는 빛을 창조한다. 사각형의 일정한 비율로 짜여진 캔버스 위에서 손에 쥔 몇 개의 붓과 물감으로 빛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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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의 빛이 지녔던 영광은 닳고 닳았지만, 인간의 실존은 여전히 빛과 관계한다. 강규건의 그림 속 인물 역시 그가 만들어낸 빛과 호응한다. 빛의 위치와 형태, 크기에 따라 뉘앙스를 달리 하는 인물은 어떠한 고유성이나 서사를 지니기 보다 우리와 조금 닮거나 닮지 않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익명을 통해 보편의 속성을 획득한 채로, 빛 또는 밝은 빛과 대비되는 어둠 가운데 유유히 놓여 있다. 이때 그림이 지시하는 것은 개별 빛과 개별 인물이 아닌 빛으로 하여금 모호해진 인물의 실존, 둘 사이에 내재하는 지속적인 관계성이다.
한편 제 3의 빛을 구현하기 위해 수반된 과정에는 기존 작업이 거쳐가지 않았던 새로운 단계가 선행되었다. 캔버스 위의 빛을 조형하기에 앞서 행해지는 드로잉이다. 드로잉은 부정확하고 더딜지라도 한결 유연한 회화적 시도를 가능케 해주었다. 바라보는 눈과 그리는 손에 익은 빛깔의 색을 내려 두고, 생경한 색의 빛을 기꺼이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강규건이 매일 마주하는 사각형 틀 안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고 갱신해내는 방법의 일환이기도 하다. 제 3의 빛 또한 제 2의 빛을 모방하던 태도를 쇄신하는 과정에서 출현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그에게 화가의 일, 회화의 과제란 계속해서 다른 무엇으로 거듭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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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빛이 있었다. 빛은 세계를 찬란히 비추기도, 이면의 어둠과 그림자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과거나 현재나 세계와 세계에 속한 인간 곁에는 빛이 있다. 그리고 여기, 화가에 의해 창조된 빛이 있다. 작업실 한 켠을 밝히던 빛은 이제 또 다른 어딘가에 닿을 테고, 그곳에서 태초의 빛처럼 하나 뿐이면서 여러 개인 세계의 처음에 놓일 것이다.
글. 모희
[1] 창세기 1장 3절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피아트 룩스(Fiat lux)’라는 라틴어로도 널리 알려진 이 구절은 많은 화가와 작곡가, 시인과 소설가, 학자와 성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브루스 왓슨, 『빛: 신화와 과학, 문명 오디세이』, 이수영 역, 삼천리, 31쪽 참고.
[2] 신화학자들은 수많은 창조신화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범주화 했다. 1) 잠수유형, 2) 온 세상의 부모 유형, 3) 무로부터의 창조 유형, 4) 출현 유형, 5) 우주의 알 유형이 그것이다. 위의 책, 20-21쪽.
[3] 강규건 작가노트, 2023.
[4] 키아로스쿠로는 이탈리아어로 밝음을 뜻하는 키아로(chiaro)와 어두움을 뜻하는 오스쿠로(oscuro)의 합성어이다. 말 그대로 ‘명암’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회화에서 묘사된 대상의 뚜렷한 명암 대비 효과를 가리킨다.
[5] Paul Kriwaczek, In Search of Zarathustra,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2, p.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