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양지훈 Solo Exhibition
《다르게 총 쏘기》
12. December 2023 - 31. December 2023
여기 진부한 비유가 하나 있다. 카메라로 대상을 촬영하는 것, 혹은 사진을 찍고 영화를 찍는 것을 총 쏘는 행위와 연결 짓는 비유가 그것이다. 1839년에 발명된 사진과 1862년에 발명된 기관총과 1895년에 발명된 영화 사이를 오가는, 슛(shoot)이라는 단어를 매개로 하는 비유. 그것은 진부한만큼이나 적확하기도 하다. 그 비유는 카메라에 내재된 폭력성을 우리에게 곧바로 전달하고, 무언가를 촬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촬영된 것을 본다는 행위 마저도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폭력성까지 암시한다. 무언가를 카메라로 촬영한다는 것은, 그렇게 촬영된 것을 본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폭력적인 행위이다. 폭력적이서 멈춰야 하나? 그건 아니다.
새삼 사진(가)의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개인적인 계기가 얼마 전에 있었다. 지난 11월 22일 경기도 파주시는 용주골이라는 이름의 집창촌을 무단 철거하기 위해 행정대집행을 시도했다. 나는 활동가들과 용주골 종사자들이 행정대집행을 막는 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파주로 향했고, 그건 근 10년만의 시위/집회 현장으로 발걸음을 뗀 일이었다. 스크럼을 짜고 대오 맨 앞 줄에 서서 반대편을 바라보았을 때, 새삼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러 매체로부터 파견된 꽤나 큰 카메라들과 그 카메라를 든, 아니 그 카메라들에 매달려 있는 형세를 하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곧 들이닥칠 용역과 파주시청 직원들의 자리에 서서 현장을 촬영하던 그들은 이내 어떻게 용역과 시청 직원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줄 지 고민하면서 길 한 켠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렌즈는 우리를 향해 있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길 기대하면서, 스펙터클이 발생하길 고대하면서. 결국 그들은 우리가 있던 3구역이 아닌 더 큰 대치 상황이 발생한 1구역으로 우르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약간의 역겨움을 느꼈다. 스펙터클이 뭐라고?
양지훈은 <테이큰>에서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카메라를 비판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걸 넘어서, 비극과 참사를 되려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비약이다. 일종의 절망감이 서려 있는 이 비약에는, 동시에 뭉툭하지만 에너지가 응결되어 있는 불만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양지훈의 불만은 <포수>와 <도라지>에 이르러서는 다큐멘터리 영화 자체에 대한 것으로 넘어간다. 거기선 이런 질문들이 가능해진다. 다큐멘터리에서 왜 제주 4.3 사건의 생존자들은 꼭 영웅이 되거나 숭고한 희생자가 되어야만 하는가? 다큐멘터리는 왜 어떠한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들, 혹은 소수자들을 특정한 이미지로만 표상하는가? 그들에게 일상이 없는 것처럼. 피해 사실과 소수자성만이 그들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인 것처럼.
전시 제목이 내비치듯 양지훈의 불만은 “다르게” 총을 쏘겠다는 다짐으로 나아간다. 이는 카메라를 든다는 행위가 애초부터 폭력적인 행위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폭력의 대안적인 방식들을 찾아보겠다는 다짐이다. 폭력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폭력임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떻게 다르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보겠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포수>와 <도라지>에서 그 고민의 결과를 볼 수 있다.
<포수>에서 작가는 4.3 사건의 생존자인 할아버지를 인터뷰한다. 할아버지는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된 것을 보며 자식들에게 전화로 자랑을 하기도 하고, 손자에 대한 뿌듯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손자와 맥주를 마시고,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그는 간헐적으로 4.3에 대해 이야기 한다. <포수>에서 인상적인 것은 4.3을 다룬 보통의 다큐멘터리에서라면 잘려 나갔을 장면들이 계속해서 4.3에 관한 발화가 이뤄지는 시공간에 끼어든다는 점이다. 가령, 감독이 카메라를 조정하기 위해 인터뷰이인 할아버지의 말을 자르는 장면 같은 것들. 아니면, 이제 4.3에 대해서 그만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얼굴.
한편 재일조선인을 다룬 <도라지>는 무엇보다 여행 브이로그의 형식을 띰으로써, 그리고 작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을 블러처리 함으로써 “다르게 총쏘기” 하고 있음을 표명한다. 작가는 대학시절 알게 된 ‘아는 형’이자 재일조선인인 익명의 남성을 찾아가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북한 방문 비디오도 보고, 그의 가족들과 만나서 인터뷰 비슷한 무언가를 하지만 이 작업에서 주로 담기는 것은 사람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별 의미없는 수다를 떨고, 노래를 부르며 노닥거리는 시간들이다. 숭고한 희생자도, 주인공도 아닌 평범한 개별자로서의 특별한 이들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양지훈의 작업은 메타-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3 사건이나 재일조선인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더 넓게는 스펙터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사진적 이미지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무빙-이미지가 이 전시 《다르게 총쏘기》가 탐구하고 지향하는 바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수>, <테이큰>, <도라지>는 자신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과 전적으로 다름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사진을 찍는다는 것,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것, 달리 말해 카메라를 든다는 행위가 기본적으로 “총쏘기”에 다름 아님을 인정하고 그 인정으로부터 무언가를 “다르게” 시도해볼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처음 언급했던 슛이라는 단어로 돌아가보자. 슛은 총을 쏘거나, 총을 쏘아서 누군가를 죽이고 다치게 하는 행위를 이른다. 또한 슛은 영화나 사진을 촬영하고 찍는 행위를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스포츠 경기에서 득점을 위해 공을 골문으로 보내는 행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슛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 경기에서 흥분한 캐스터들이 “슛-!”이라고 연신 외치는 소리를 기억해보자. 그렇다면 “다르게 총쏘기”는 “다르게 골문으로 공을 보내기”와도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일지도? 공을 골문에 다르게 보낸다는 것은 득점의 기회가 찾아온 순간에 어떤 슈팅을 할 것이냐와도 관계가 있겠지만, 그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상대를 압박하여 공을 탈취했는지, 어떻게 필드를 장악하고 공간들을 활용했는지, 패스가 연결되는 시퀀스를 어떻게 구성했는지와도 관계가 있다. 결국 득점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 역시 중요함을 인식하기. 경기는 90분이고 과정을 잘 다룬다면 승리할 확률은 언제나 높아진다. 미적이고 (가능하다면) 정치적인 승리를 위해.
글. 함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