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박경진 Solo Exhibition
< 차갑고 희끗한 순간들을 말하기 >
7. November 2023 - 20. November 2023
사생 한 조각 사색 한 조각, 번갈아 채우는 기록 퍼즐
사생(寫生). 박경진 그림의 출발선이다. 그는 사생하며 산의 부분들을 담아낸다. 유년 시절부터 집 근처에 늘 있었던 산은 작가에게 무엇보다 훌륭한 놀이터였다. 어렸을 적 놀토 때마다 산행을 즐겼을 만큼 산과 숲은 그에게 편안하고 친숙한, 애정 어린 장소다. 그렇기에 어른이 된 지금 화가로서 화폭에 산세(山勢)를 담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른 아침부터 그리기를 위한 재료를 챙겨 산을 오른다. 산과 나, 둘만의 공간은 시선과 감정에 집중하기 제격이었을 것이다. 이 과정은 물론 녹록지 않다. 계절과 날씨에 관계없이 산행하는 작가는 여름에는 모기를 포함한 각종 벌레와 사투를 벌이고,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와 씨름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의 어느 부분을 정하고, 자리를 잡는다. 산은 늘 보이는 무언가와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빽빽한 산 중턱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의 무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멈춰있는 듯 보이던 숲의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바람에 잎이 흔들리며 만들어 내는 미세한 속삭임, 그 사이로 스미는 빛과 공기의 모양, 새들의 날갯짓, 산짐승을 포함한 정체 모를 생물들의 움직임이 모두 산의 표정이었다. 그러한 산세를 기록한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기록의 방식이다. 박경진은 눈 앞에 펼쳐진 숲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흔히 일컫는 '완성'된 그림 한 점을 얻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산행에서 만난 숲의 절경을 종이에 빠르게 드로잉한다. 그러고는 그 드로잉을 기반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우리가 전시실에서 마주하는 박경진의 그림들은 모두 이 드로잉을 모태로 작가의 작업실에서 다시 그려진 것들이다. 즉, 사생의 직접적 결과는 드로잉이며, 드로잉이라는 기록물을 다시 화폭에 옮기는 방식으로 작업을 제작한다. 드로잉을 들여다보며 그곳에 머문 감각을 가만히 되새긴다. 기억이라는 주관적 재료가 그림의 방향을 제안한다. 감각을 기록하고, 기록을 기반으로 기억을 불러오며, 이것이 붓질이라는 몸짓으로 화면에 다시 기록된다. 그렇다면 박경진의 사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의 사생은 사실 사색(思索)에 가깝다. 물론 야외 풍경을 그 자리에서 화면에 담아내는 일반적 사생의 구도를 취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사실적 묘사에 입각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온도, 습도, 풍량, 햇살을 비롯한 작가의 기분과 경험 등 당일의 모든 상황과의 상호작용에 집중하고 정취를 감각으로 느끼며 그것을 드로잉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산이라는 공간을 작품의 소재로 삼은 또 다른 이유는 동양화가로서의 책임 혹은 관심과도 관련이 있다. 작가는 언제나 동양화에서 다루는 '정신'과 '본질'에 주목한다. 그에게 산수화는 산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낸 것이다. 그래서 산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기반한 현상학적 접근법에 의해 작품을 제작한다. 누구나 사색한다. 여느 작가도 사생을 한다. 그러나 박경진의 사색과 사생은 남다르다. 사색을 사생하거나, 동시에 사생을 사색한다. 즉, 산세의 풍광으로부터 얻은 그날의 주관적 '기억'을 드로잉이라는 형태를 통해 '기록'하거나, 드로잉을 다시 화폭에 옮겨 그리며 산의 '본질'에 보다 가까이 닿으려 한다. 산의 파편과 부분을 담아내어 기억하고 기록하며 언젠가 이 단편적 기록의 집합을 산의 본질이라 칭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산의 정신에, 본질에 닿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그의 사생 드로잉은 산의 단편을 담은 기억 조각이고, 화면으로 이전된 것은 작가의 기억이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인 ⟪차갑고 희끗한 순간들을 말하기⟫에서도 '차갑고 희끗한 순간들'은 감각에 기반한 기억을, '말하기'는 독백 형태의 사색을 각각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드로잉은 화면으로 다시 소환되고, 기억이라는 무형의 존재는 산세라는 유형의 형태와 뒤섞이며 추상적 이미지로 발현된다. 제작 방식에 있어서는 재료와 표현 기법 모두 동서양의 구별을 두지 않은 채 자유롭게 혼용한다. 작품 〈걷혀지는 겨울 no.1,2,3,6,8〉(2023)을 보면, 동양화적 요소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드러난다. 힘 있는 먹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기운생동의 에너지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이다. 주로 굵직한 나무 기둥이나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가지를 표현하고 있다. 최소한의 묘사로 남겨진 여백은 고요를 깨는 일필휘지의 즉발적 파동으로 가득 차고, 호기로운 필치로 그려진 대상의 기운이 감상자를 압도한다. 반면 〈밝고 차가운 겨울지도〉(2023)와 같이 수차례의 묘사가 동원되는 그림도 있다. 얇은 아크릴 물감을 여러 번 얹어 밀도 높은 화면으로 완성하는 방식이다. 붓질의 축적과 시간의 중첩이 만들어 내는 겹은 또 다른 울림을 선사한다. 마치 무수한 나뭇잎과 나무들의 겹이 이루어 내는 산세의 밀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흰색을 머금어 은은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빛깔의 물감으로 채색을 진행한다는 점 또한 박경진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묵직하게 화폭을 점유하는 형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희끗희끗하고 여린 색채는 엷게 깔린 공기를, 조용히 내쉬는 호흡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나아가 호분 젯소를 활용하여 표면에 재질감을 더한다던가, 안료를 흩뿌려 두터운 마티에르를 이루는 표현 방식을 구사하여 감상에 다채로운 즐거움을 더한다.
사계에 의해 바뀌는 산의 모습 또한 작가가 흥미롭게 관찰하는 지점이다. 그의 그림은 봄의 여린 잎들과 미세먼지의 꿉꿉함, 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얼굴에 흘러내린 땀을 머금고, (특히 이번 전시 출품작의 시간적 배경이 된) 가을과 겨울의 쾌청하지만 쓸쓸한, 차가운 색감이 주는 맑은 기운을 내포한다. 작가는 분명 시시각각 변하는 산의 모습에서 지나가는 계절과 속절없는 시간을 느끼며, 아쉬움과 애절함이 깃든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든 화면에서 붓으로 숲을 찬찬히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러나 단순히 산을 사랑하여 애처로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새로운 시간을 묵묵하게 마주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산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이의 태도일 것이다. 앞으로 산은 어느 부분을 작가에게 내어줄 것 인가. 작가는 그 모습을 어떻게 기록할 것 인가. 지금까지와 같이 박경진은 언제나 산을 헤맬 것이다. 기록 퍼즐을 꽉 채워, 산의 본질과 마주할 때까지.
글. 정유연 (OCI미술관 선임 큐레이터 │ Senior Curator, OCI Museum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