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JIK

안옥현 Solo Exhibition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서로 신성함으로 이끈다》

9. May - 1. Junel 2024

조르바는 동네 청년들과 모여 같은 건물 다른 층에 사는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밤마다 그녀의 창문 아래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며 사랑을 구한다. 하루는 노래를 부르던 중에 자기 집에 잠깐 들어가게 된다. 그때 화장을 정성스럽게 하고 가장 예쁜 옷을 입은 채 창문 아래로 매트리스를 끌어 놓고 그 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게 몰래 누워서, 젊은 청년들의 사랑의 세레나데를 수줍게 듣고 있던 자신의 80세 넘은 할머니를 발견한다. 청년 조르바는 80세 넘은 할머니의 욕망에 경악하며, “냄새나는 산송장!”이라고 할머니에게 욕을 퍼붓고 분노한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이다. 앉아서 노래를 듣기도 힘이 들어 매트리스를 끌어다 누워 있어야 할 만큼 거동이 힘든 고령의 할머니의 욕망은 어떤 것일까? 젊은 손자가 경악하고 분노할 만큼 그녀의 욕망은 그토록 수치스러운 것인가?


2015년 XX에서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농약이 든 사이다를 먹여 살해한 일명 ‘농약 사이다 사건’은 동기 불분명으로 대충 종결되었지만, 마을 노인들 간의 치정일 수 있다는 후문을 듣게 되었다. 인생의 마지막 로맨스는 종종 시골의 노인 회관과 노인 요양시설에서 일어나고 그것이 삶의 마지막 로맨스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더욱 치열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2015년 XX 농약 사이다 사건을 모티브로 한 비디오 〈사랑의 전당〉(단채널비디오, 사운드, 14분)은 80세가 넘은 노인들 간 벌어지는 치정에 관한 내용으로, 여기에 1890년경의 오페라 <팔리아치>의 마지막 2막 부분의 구조를 가져왔다.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광대들이란 뜻의 〈팔리아치〉는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괴로워하는 남자 광대의 이야기다. 무대 위에서 남자 광대는 자기 아내가 맡은 역이 현실 속 아내의 불륜과 비슷하여 현실과 연극을 혼동하고 연극 도중에 아내를 찔러 죽이고, 객석에서 그 상황을 보다가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온 아내의 정부까지 죽이게 된다. 결국 살인으로 치닫게 되는 치정이란 사랑은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지만, 그것이 시공간을 막론하고 인간사에 늘 따라붙어 다닌 흔한 스토리여서 그런지 동시에 진부하기까지 하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어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결국 살인으로 끝나 버리기 쉬운 치정의 구조는 1890년경 오페라 〈팔리아치〉에서나, 2015년 XX에서나, 현재 어느 도시 어느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그것과 똑같다. 어떤 서막이나 1막의 전후 내용이 없이도 결국 모두 같은 피날레의 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비디오 〈사랑의 전당〉은 대부분의 비극적인 치정의 판에 박은 듯한 구조 자체를 보여준다.


그나저나 나는 왜 고령의 노인들 간의 치정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것인가? 비 오는 저녁, 런던 피카디리 근처 골목을 걷고 있었다. 열 보 정도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두어 명이 길가 한 노숙자의 텐트 앞에 걸음을 멈추고 텐트를 보았고, 순간 나도 멈추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텐트의 윗부분이 조금씩 위아래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의 에로틱한 움직임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을 1~2분 정도 그 자리에 붙들어 두었다. 그때 느낀 거북하고 묘한 기분은 움직이는 텐트 불투명한 천막 아래로 보이지 않는 노숙자들의 사랑 행위를 상상해서이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사랑을 나누고 있을 노숙자들이 타자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어서이었을 것이다. 혹시 우리 사회는 80세가 넘은 고령의 노인들 역시 타자의 영역으로 슬쩍 밀어 놓고 있는 건 아닐까? 왜 나는 비디오 작업 〈사랑의 전당〉 안에서 불편한 타자들의 뒤틀린 사랑을 상상하고 그것을 관음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건가? 어쩌면 나는 그것들을 상상하고 조야한 세트처럼 만들어 놓은 뒤 그사이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가엾은 구경꾼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에서 50대 중반의 늙은 예술가 아쉔바흐는 베니스에서 만난 미소년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고 가슴 벅찬 황홀감에 빠진다. 미소년에게서 신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의 유일하고 순수한 완전함 찬미하는 늙은 아쉔바흐는 동시에 자신의 초라한 늙음을 바라본다. 비디오 〈사랑의 전당〉과 함께 보여주는 사진들 〈여자와 남자는 서로 신성함으로 이끈다〉는 젊은 몸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아쉔바흐와 같은 오십 대 중반인 나는 카메라 뒤에서 젊고 아름다운 몸을 들여다보고 셔터를 눌러 댄다. 그러한 나의 시선과 행위에 늙은 아쉔바흐의 시선과 사색이 교차되어 있음을 숨길 수 없다. 또한 늙은 예술가 아쉔바흐의 예술에 대한 고뇌, 창작의 한계, 늙어감의 공포는 내가 현재 안고 있는 것들이다. 문득,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거울을 들여다봤을 때 100살인지 120살인지 추측할 수도 없을 만큼 늙어버린 나의 얼굴과 느닷없이 맞닥뜨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