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정용국 Solo Exhibition

<피막>

1. Apr  - 19. Apr 2020



피막-희미해진 사실성의 세계


  왜 풍경 아닌 산수였을까? 근래에 보아온 도시풍경 그림들이 사회적 현실을 담고 있다면 이 전시는 현실을 담는 그릇-산수화라는 그림의 형식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식이 일정한 틀을 지니게 되면 그 틀을 벗어나는 사유와 감각을 담을 수 없다. 전근대적인 산수화의 형식도 마찬가지다. “피_막”전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산수화의 형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함께 ‘지금 이 순간’으로 밀어 넣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을 선보인다.


  “피_막”전의 산수화는 전체를 조망한 그림 <원근법>과 부분을 그린 그림 <산수>, <SKIN>으로 나뉜다. 작가의 말을 빌면  <원근법>은 인터넷 사진과 실제의 경험으로 구축된 허구의 산수이고 <산수>는 다음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 정방형의 <SKIN>은 풍경사진을 보고 옮긴 것이라 한다. 세 가지 작업은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면서 생각과 그리기를 진전시켜 나간다고 한다. 정방형의 <SKIN>은 모듈처럼 하나의 독립된 작업으로서도 기능하지만 서로 조합되어 연출할 수도 있다. 또한 화선지 뒷면에 색지를 덧대거나나 색을 발라서 은근하게 색을 입힌 점은 생소하지만 특색 있는 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접근을 통해서 정용국은 옛 산수화가 지닌 질서의 체계를 비非질서의 체계로 교란시키면서 형식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원근법과 스킨skin은 근대의식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일루전의 핵심이다. 동양의 산수화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의도적으로 두 가지 핵심요소를 제목으로 단 것일까? 나는 원근법과 스킨skin을 중심으로 “피_막”전의 산수화 형식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옛 산수화에는 길이 나있다. 길은 장소와 지형의 시공간을 마음 안에서 일어나게 하는 장치로서, 정지의 순간을 담고 있지만 마음의 공간에서는 끊임없는 움직임을 일으킨다. 산수화는 원경과 근경의 차이를 두어 거리감을 조성한다. 대체로 근경의 사물은 원경에 비해 크게 하거나 세밀하게 그려진다. 여백에 의해서 거리감은 한층 더 풍부해지는데, 까다로운 점은 화선지라는 물성의 성질 때문에 그려야할 것과 그리지 말아야할 것을 잘 구분하여 여백을 살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원근법>에서는 길이 사라졌다. 길이 사라졌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지각과 경험이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다층적으로 짜깁기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그로 인해 원경과 근경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그림의 공간성은 약화되고 평면적으로 된다. <원근법>은 포토몽타쥬photomontage에 가깝다. 옛 산수화 형식보다는 <원근법>의 방식이 지금의 현실의 지각과 경험에 보다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시제목인 ‘피막’은 얇은 껍질이다. 정용국은 그것을 스킨skin으로 옮기면서 사물의 질감, 살결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다. 이것을 준법의 문제와 연결시킨 작업이 <SKIN>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수묵화에서 스킨skin은 대단히 까다로운 것이면서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수묵화의 준법은 사물의 질감이 아닌 형태에 의해서 사물성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질감이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바위와 안개, 나무, 파도 등을 그려내는 준법에는 질감을 의식한 방법론적 해석이 이미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눈앞에서 생생한 질감을 보여 주려했던 서양화와 달리 옛 산수화는 관람자의 마음속에서 사물성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정용국은 이 전시에서 사물을 구분해주던 준법의 차이마저 지워버리고 산수를 그저 백묘白描로 그려놓았다. 


  백묘로 그린 정방형의 <SKIN> 작업은 풍경사진을 옮긴 것이다. 작가의 말을 빌면, 이 작업은 사진을 옮겨 그리되 몸이 경험하고 감각한 방식으로 사물의 피부를 그려낸 것이라 한다.   이때 사실의 세계는 거의 사라지고 희미한 사실성의 세계만 남게 된다. 실제로 화선지에 남아있는 것은 사실세계를 포착하려는 긴급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지닌 ‘운’의 펼침만 있다. 사물들-바위 파도 나무들은 상이하면서도 동시적인 리듬을 지닌다. 이 리듬에 관하여, 기운생동氣韻生動에 대한 그의 해석은 꽤 흥미롭다. 모든 기는 운(리듬)에 의해 조금씩 생동(움직임)을 달리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한 점은 ‘생동’보다는 ‘운’에 있다. 실제로 작은 붓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대상성에 의한 ‘운’의 차이가 미세하게 드러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사물들의 차이를 지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림의 방위는 가늠하기는 어렵고 흐릿한 형태와 붓의 움직임, 먹빛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준법의 대상으로부터 준법 그 자체로 산수화가 이행되는 순간이다. 추상적이면서도 리얼리티를 담은 어떤 미니멀한 순간으로 남고자 하는 것일까. 현실을 모방하지 않으면서 현실처럼 느껴질 수 있는 산수화는 가능한 것일까. 내게 <SKIN> 의 방식은 자국이나 흔적에 가까워보인다. 이들은 프로타주frottage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이 되었든 사물성의 약화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김우창은 「풍경과 마음」에서, 동양화의 산수는 구체성에서 비롯된 추상화된 질서이고 원형이 되어 주제와 기법의 유연성에 한계를 부여하고 있다고 했다. 동양화의 단조로움은 그에 있다고 해석한다. 정용국이 그 동안 해온 일련의 작업들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실천들이었다고 본다. 한국화에서 잘 다루지 않는 서사-죽음을 신체 장기를 이용하여 식물처럼 그려내었고, 먹의 정신성이 아닌 물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잉크토너로 대체하여 보이지 않는 대상-속도나 연기를 포착한 작업도 선보였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구술 자료들을 붓과 먹으로 전시장 벽에 수 만자를 써내려가기도 했다. 이 모든 지난한 과정은 옛 형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긍정하면서도 부정의 기호를 덧붙이는 일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현실적인 제약을 두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영화에 대한 자유로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다. 어느 매체이건 제약이 있기 마련이지만 동시에 제약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먹과 화선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적절한 매체가 아닐 수도 있다. 먹과 화선지를 고집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지만 뭔가 고루한 것 불충분한 것 갑갑한 것으로 여기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2000년 초에 불었던 동양화의 변화도 매체와 현실감각 사이의 불균형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불가피했을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장르의 특성은 약화되었고 그림들은 평범해졌다. 나는 정용국의 작업이 이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업의 정체성을 찾으려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글. 노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