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GSAN

양하 Solo Exhibition

<매달 첫 번째 주 월요일 정오 열두 시에 경보음이 울린다>

9 - 28. Dec 2022 

우리에게 찾아온 불행을 불행 삼으며 - 그 너머에 내비치는 / 비친 대신, 이곳에서


불행은 닥치는 것이며 자발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다.  설령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불행이다. 우리에게 닥친 불행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되어 후세에 남겨진다. 이 전달 과정에 딜레마가 발생한다. 형상화/형식화한 불행은 경계와 교훈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익숙한, 익숙해진 것으로 남는다. 불행은 형상화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전승 과정에서 껍데기만 남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행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거나, 이미 습관이 된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형상화와 형식화, 전달과 망각(습관화) 사이에 이미지는 들어온다.  그 어렴풋한 생김새를 가진 이미지는 그 사이의 문턱을 넘나든다. 그것은 오히려 불행의 그려내기 어려움에 그 자리를 찾는다.  이미지를 보고 우리는 거기에 힘을 가한 주체를 종종 비판한다 - 누군가에 의해 강압적으로 억눌린 것, 그리고 사실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미지는 두 주장 사이에 위치하고 교묘하게 오간다. 그것은 인간이 남기는 것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기록과 전달에 충실한 자세와 그 충실한 자세가 초래하는 습관화를 불충실함으로 깨는 기회가 된다. 


양하의 개인전 <매달 첫 번째 주 월요일 정오 열두 시에 경보음이 울린다>에서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보게 될까? 작가 노트를 읽어보면 네덜란드에서 사람들은 불행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여기서 경보음이라는 소리도, 이미 감염이라는 팬데믹의 형태로 왔거나 아직 오지 않은 더 커다란 불행, 그리고 이 불행을 준비하는 시간도 비시각적이다. 비시각적인 요소들은 우리가 안전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자리와 공간에 침입한다. 그것이 직접적인 위험이나 그 위험의 존재를 알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불행을 알리는 존재는 불행과 함께 순화하는 길을 따라간다. 닥친 일이 순간적으로 지나가듯, 관습처럼 자리잡힌 반복된 패턴 속에서 우리는 더는 경계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저 흘러가는 것만큼 불행한 것도 없지 않을까. 작가가 그리는 이미지는 어렴풋하고 추상적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오히려 그런 특징에 형상화와 형식화, 전달과 망각(습관화)을 깨고 불행을 직시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 


폭발의 장면은 구름의 모양으로 화면에 들어온다. 불행, 경보음과 바깥의 위험, 그리고 이를 대비하는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요소가 뒤섞인 감각의 장에서 보낸 작가는 왜 하필 구름의 형상을 그렸을까. 이 이미지는 작품에서 불행을 직시하는 일, 그것은 애초에 경보음에 주어진 역할처럼 습관화된 삶에 충격을 준다. 재난 현장의 시각 자료를 참고하여 그린 이미지는 불행이 그렇듯이 압도와 수용 사이에 걸쳐 있다. 순간적으로 압도당했다가 이를 남기려고 형상화/형식화한 결과가 폭발의 장면이다. 압도와 수용은 작품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화면에 퍼진 얼룩은 두 가지 지표적 결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무언가를 그려내는 행위와 거기에 있던 정체를 가려놓는 행위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 양가적 결과는 작품의 공간적 구조를 내적 공간으로 만들면서 내가 불행과 나를 직시하는 기회로서 창출된다. 폐쇄된 공간 안에서 뿜어져 나온 이미지 - 그곳은 이미지를 통해서 불행을 마주한 내면을 가다듬는 자리가 된다. 화면이라는, 그리고 작품의 화면만큼 정해져 있는 공간적 구도는 작가가 생활하던 방과 공명하면서 내가 보고 동시에 내 안에서 우러나온 이미지로 출현한다. 내부에서 우러나옴은 그리기를 통해 불행을 마주한 내가 마음을 표출하고 평온을 위해 보호하고 가리는, 내 공간을 만드는 일로 승화된다. 


공간적 구조 안에서 나는 침입해 들어온 비시각적인 불행을 보고, 표상하고 가리는 그리기라는 행위를 통해 내 마음을 표출하고 동시에 나만의 공간을 만든다. 화면에서, 그/그리고 공간적 구조 속에서 이미지는 윤곽을 서서히 갖기 시작한다. 비시각적인,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을 형태 짓는 행위, 그것은 작품에서 불행을 그리고, 이를 마주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일의 결과가 동시에 출발점이 된다. 불행 앞에서 우리는 심리적으로 낮은 데에 있다 - 그저 당할 수 밖에 없거나, 익숙함 속에 망각되거나. 내 눈앞에 나타난 이미지는 그 너머의 것 - 구세주의 도래나, 바깥의 비관적인 상황이나 - 대신 작품에서 그 시선을 내면으로 돌린다. 불행의 재현 대신 - 그러니까 불행을 모방하거나, 불행이 다시 오는 걸 두려워하는 대신, 우리는 이미지를 보고 내면에/의 일어섬을 감각한다. 우리 앞에 들어오고 놓인 이미지는 구름처럼 보였다가 다른 형태로 변한다. 마치 날개가 달린 것 처럼 자라나는 모습. 예전에 구름을 타고 온 천사가 그랬다면 보고 있는 사람은 그 날개를 이제 스스로, 내적으로 달게 된다. 내 안에서 불행을 직시하고,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콘노 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