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정경빈 Solo Exhibition

<다리없는 산책>

9. Sep 2022 - 18. Sep 2022


산책을 산책하기   


정경빈은 그녀가 과거에 보았던 풍경을 그린다. 그풍경은미국여행중비행기창문아래로 내려다보았던 땅에서부터 브루클린 식물원에서 마주친 풀, 어느 골목길 담벼락 곁에 피어있던 장미, 산을 오르다 발견한 계곡의 바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작가가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여타 기록 매체의 도움을받지않고기억에만의존한채이러한 자연물을 회화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전시 제목인 <다리없는산책>은 머릿속으로만 오롯이 과거의 풍경을다시한번거니는바로그특유의작업 과정을 일컫는다.

작가는 현실 속에서 마주한 자연물을 보며 종종 사람의 신체를 떠올리거나 혹은 그것의 젠더를상상한다.풀어헤친머리카락같은풀, 희고 단단하고 긴 갈비뼈처럼 자라난 나무, 소녀의 등처럼생긴바위.그로인해작가의회화역시 풍경의 객관적 재현보다는 그러한 관찰을 예민하게 담아내는것을좀더염두에두는듯하다.가령 포천의한채석장을다녀온뒤그린<포천22: 여자바위어깨 (Pocheon22: The She- Shoulder-Rock)>는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채석장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흰색,보라색,갈색등여러색조의단단하고강한 선이수없이겹쳐져돌의표면을이루고,그돌들 사이로 녹색의 선이 물줄기처럼 흘러내린다. 메마르고 거친 회색, 날카롭게 깨진 모서리들이 만드는 어두운 직선의 물성은 이 화면에서 찾을 수 없다. 한편, 실제의 암벽보다 턱없이 작은 캔버스역시그규모의변화를통해또다른감각을 환기하려 한다.

기억만으로 재구성한 화면, 신체와 물성에대한집요한탐색,그리고그로인해 발생하는 정동 (affect)의 효과는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사였다. 가령 2020년의 전시 <섀도우(Shadow)>(인스턴트루프, 2020)에서 갤러리의세벽을가득채웠던녹색의캔버스들은, 공간에 들어선 관객의 신체가 캔버스를 맞닥뜨렸을때발생하는정동의효과를고심하며 만든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회화들 역시 이번 전시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기억에만 의존하여 그려졌다.한편,2년전의전시와비교했을때 <다리없는산책>에서만 두드러지는 특징도 분명 존재한다. 작가가 과거에 경험한 시공간을 회화로 그려내는 과정을 "산책"으로 명명하며, 자신의 작업 과정에또다른"시간성"을적극적으로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작업의 과정은 회화를 만드는 과정 이상의 어떤 "시간적 경험"이며, 그 경험은 캔버스 위의 결과물만큼이나 큰 중요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정경빈의 작업을 단순히 회화의 맥락 안에서 "추상"으로 해석하거나, 실재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한 결과로서의 "이미지"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다소 불완전해 보인다. 아마도 이 설명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산책 자체에대한물음일것이다.다리없는산책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 산책은 현실에서 겪었던 과거의 산책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우리는 외부의 풍경을 기록하기 위한 매체로 흔히사진을사용하곤한다.사진을촬영하는 순간, 고정된 시점에서 바라본 외부 세계의 상은 카메라안으로고스란히옮겨진다.또한각각의 사진은"하나다음또하나"의원리를따라 순서대로, 서로를 침범하지 않은 채 저장된다. 하지만작가의신체는그와는전혀다른원리로 작동한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의 산책은 그녀가 기억하는 또 다른 경험과 겹쳐지고, 결합한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기억의 공간이란원할때필요한것을쉽게꺼내었다가 넣을 수 있는 단단한 서랍이기보다는, 오히려 작가가 언젠가 언급했던 "감아놓은 붕대"처럼 임시적이고 허술한, 심지어 어떤 물질은 그 사이를 투과할 수도 있는 연약한 직물에 가까울 것이다.) 작가의 다리없는산책은 그렇다면 여러 종류의 땅과 자연물, 사람, 사물들이 겹쳐진 독특한 시공간을 거니는 경험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회화를 마주한 관객은 때때로 이것이 어떤풍경과어떤사물을다루고있는지특정할수 없는 상황에 놓이곤 한다. 가령 <서울21: 서울의 초록 (Seoul21: Green of Seoul)>의 경우, 실제 그녀의 산책이 어느 장소에서 일어났으며 그 회화가 어떤자연물을중심소재로삼고있는지알만한 단서가거의없다.짙은녹색을띤삼각형형태가 화면의중심을채운한그림을볼때,어떤이는그 녹색의면을산이라생각할수도있고,어떤이는 담벼락에 자라는 식물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이를정보의부족으로인한불완전한감상이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의 원본을 특정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그녀의 다리 없는 산책은 단일한종,단선적시간,단하나의결정적순간, 익숙한물성과규모의감각을무너뜨리는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산책을 함께하는 방법을 탐색하는 것은이제전시장이라는또다른시공간을얻게된 관객의 몫이다.



박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