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선 Oksun Kim

Park portraits

1 Sep - 3 Oct  2021

얼굴로, 그 얼굴, 얼굴1)

문혜진 (미술비평)


1. 상업화랑에서 처음 선보이는 김옥선의 신작 《Park Portraits》(2019-20) 연작과 《Riverside Portraits》(2019-20) 연작은 각각 대만과 한국의 다문화 가정의 2세들을 찍은 인물 사진 작업이다. 이 연작들은 김옥선의 기존 작업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작가는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이 《No Direction Home》(2009-11)과 《Berlin Portraits》(2017--2019)를 잇는 인물 사진 3부작의 완성이라고 말했다.2) 그간 김옥선의 작업의 거개가 인물이 중심이 된 사진임을 생각할 때 혹자는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김옥선의 모든 작업은 인물 사진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제주의 나무를 찍은 《The Shining Things》(2011-14)를 제외하면 실상 김옥선의 거의 모든 사진의 피사체가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The Shining Things》의 경우도 나무가 정확히 인물을 찍는 방식과 동일하게 촬영되었음(풍경과 피사체를 분리하여 중심이 되는 피사체를 중앙에 놓고 각 피사체의 개성과 표정을 강조해 되도록 전체를 촬영)을 감안하면, 김옥선의 작업이 원론적으로 인물에 입각한 사진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작업들을 인물 사진이라고 특별히 거론한 것일까? 


2. 어쩌면 《Berlin Portraits》와 《Park Portraits》라는 제목이 일종의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베를린 초상’과 ‘공원 초상’이라는 이름처럼 《No Direction Home》, 《Berlin Portraits》, 《Park Portraits》, 《Riverside Portraits》는 인물이 사진의 7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작업들이다. 국제 결혼 커플을 찍은 《Happy Together》(2002-04)나 제주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Hamel’s Boat》(2006-08)는 인물 못지않게 공간이 중요했다. 이질적인 문화 차이를 드러내는 각종 소품들, 인물의 이국적 외모와 상충하는 자연풍광이나 건물은 피사체의 타자성을 드러내는 지표로 인물과 동등한 비중을 점유하고 있었다. 《No Direction Home》과 《Berlin Portraits》에서는 인물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배경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 작업에서도 여전히 배경의 세부는 중요하다. 이를테면 《No Direction Home》연작에 등장하는 창호지 문이나 전통 문양의 목가구는 남아시아인이나 서양인의 외양을 한 피사체의 이방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다. 하지만 인물의 비중이 커지면서 사진의 무게중심은 초상에 가까워진다. 배경은 중심 피사체인 인물을 보조해주는 주변부이지 인물을 압도하거나 인물과 경쟁하지는 않는다. 

 신작 《Park Portraits》과 《Riverside Portraits》역시 인물이 중심에 놓인다. 다만 이 연작에서 공간은 작품의 해독에 참여하기보다 문자 그대로 배경으로 완전히 물러난다. 문화적 지표가 제거된 채 장소를 특정할 수 없이 공간이 모호하게 제시되면서 인물의 중요도는 더 커진다. 특히 《Riverside Portraits》의 경우 자연은 한국이라는 기호를 전달하기보다 막연히 황량한 정서를 자아내는 요소로서 사진의 이면에 스며들어 추상적인 분위기(atmosphere)로만 작동한다. 가오슝과 타이난에서 촬영된 《Park Portraits》에서도 배경이 피사체와 관련된 지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동일하다. 여기서의 자연은 《Hamel’s Boat》에서처럼 정착도 여행도 아닌 임시 거주자로서 피사체의 모호한 상태를 드러나는 장소적 기호가 아니다. 하지만 자연이 완전히 배경으로 물러난 《Riverside Portraits》에 비하면, 식물은 반쯤은 배경이고 반쯤은 피사체인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ppm_xkz0613>(2020)나 <ppk_lht8363>(2019)처럼 배경에 가까운 경우도 있지만 <ppk_wcc1051>(2019)나 <ppk_ccs6718>(2019)처럼 인물과 식물이 절반 정도씩 비중을 차지하고 함께 찍힌 작업도 있다. 이런 경우 식물은 배경이라기보다 피사체로서 인물과 함께 일부 공간을 공유하며 같이 제시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Park Portraits》는 《No Direction Home》에서 제시된 경계인으로서의 인물 사진과 《The Shining Things》에서 실험한 대상으로서의 나무 사진을 결합했다고도 볼 수 있다. 《The Shining Things》의 종려나무가 외래종이지만 제주의 자연에 완전히 정착해 완전한 외부도 아니고 내부도 아닌 모호한 중간적 타자성을 단독 피사체로서 드러내고 있다면, 《Park Portraits》의 아열대 식물들은 인물에 비해서는 비중이 약하지만 대만에서 나고 자란 혼혈로 그 역시 중간인인 다문화 청소년들의 이국성을 지원하며 사물로서 인물 옆에 자리한다. 


3. 두 신작은 소재 외에도 형식적으로 조금 달라졌다. 우선 인물을 포착하는 프레이밍이 변했다. 《No Direction Home》과 《Berlin Portraits》의 경우 인물은 전신 샷이 기본이었다. 포즈가 균일한 《Berlin Portraits》는 모두가 전신 사진이고 《No Direction Home》의 경우에도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인물은 거의 몸 전체가 다 나오게 촬영되었다. 전신을 모두 촬영하는 방식은 딥 포커스처럼 촬영자의 의도를 억제하고 개입 없이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어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판단할 수 있게 정보를 많이 제공한다. 이 경우 대상에 대한 거리감이 확보되어 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인상이 강화된다. 반면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의 경우 카메라는 대상에 훨씬 다가간다. <ppk_cnt9898>(2019)처럼 풀 샷도 간혹 있지만, 다수의 사진은 3/4이나 1/2 등 몸의 일부를 근접 촬영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멀리서 피사체를 건조하게 바라보기보다 피사체의 눈높이에서 몸을 낮춰 더 다가가는 태도를 보인다. 앉아 있는 자세가 많은 것도 카메라의 시선을 낮추고 보는 이가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다. 한편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빛의 처리다. 같은 야외 촬영이라도 흐린 날을 골라 조도를 균일하게 조절한 《Hamel’s Boat》나 《The Shining Things》와 비교하면, 《Park Portraits》는 상당히 다채로운 톤을 보여준다. 숲에서 찍어서 어둡게 나온 <ppk_ccs6718>, 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조금 밝은 톤의 <ppm_jlg1577>(2020), 흐린 날 찍은 회색 톤인 <ppk_lht8363>, 햇빛을 직접 받아 부분 부분 얼룩진 음영을 지닌 <ppk_chn8869>의 다양함은 이전에 비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한강변에서 찍은 《Riverside Portraits》는 상대적으로 톤이 균질하기는 하나 이 경우 역시 자세히 보면 상대적으로 밝은 사진과 어두운 사진이 감지된다. <pps_jeh4648>는 전자의 사례고 <pps_khn6718>는 후자의 사례다. 이런 변화는 연작의 통일성을 맞추려는 작가의 개입을 줄이고 그때그때의 상황과 피사체에 맞게 사진을 좀 더 열어놓은 인상을 준다.


4. 그렇다면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피사체와의 거리를 좁힌 것인가? 이 지점은 가장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과거 작업에서도 피사체와의 거리는 김옥선 작업에서 가장 복합적이고도 미묘한 문제였다. 일차적으로 김옥선의 모든 피사체는 작가의 삶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대상이다. 30대 여성들의 벗은 몸을 통해 사회 통념에 굴하지 않는 주체적 자의식을 드러낸 초기작 《Woman in a Room》(1995-1996), 국제결혼 커플의 문화 차이와 갈등을 드러낸 《Happy Together》는 국제결혼을 한 교육받은 30대 여성으로서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소재를 대상으로 했다. 《Happy Together》에서 관객을 직시하는 쪽이 언제나 여성인 것은 작가가 국제결혼 커플 중 아내에 이입해 여성을 사진의 주인공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이후 작업의 주제는 자아로부터 타자나 사물로 확대되었지만, 작가의 구체적인 실제 삶에서 소재가 발생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했다. 제주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Hamel’s Boat》는 이방인으로 제주에 살고 있는 남편을 이해해보려는 취지로 시작되었고, 《The Shining Things》는 타자성을 거주지의 외래종인 종려나무와 야자수에서 발견한 것이며, 《Berlin Portraits》는 한국인이면서 타국에서 반평생을 보낸 파독 간호사 할머니들을 통해 경계인의 삶에 대한 동질감과 자신보다 오래 국제결혼을 지속한 선배 여성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것이다.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 역시 작가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다. 한국과 대만의 십대 혼혈 청소년들을 촬영한 이 작업은 비슷한 나이가 된 작가의 딸을 통해 자신과는 또 다른 경계인의 삶을 사는/살아갈 청년들을 주목하게 된 데서 출발했다. 

 이 모든 작업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삶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피사체와 모종의 거리를 유지한다. 피사체에 감정 이입해 동일시하기보다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한 채 일정 부분 관찰자로 남아 있는 것은 김옥선 사진 전반에 나타나는 특유의 면모다. 작가의 자아와 가장 가깝던 《Happy Together》의 경우에도 피사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동질감만은 아니다. 무표정한 인물의 얼굴, 감정이 절제되고 정적인 상황 연출, 차분하게 가라앉은 사진의 톤은 대상을 끌어안거나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관찰자의 태도를 지원한다. 그런 점에서 김옥선의 태도는 낸 골딘(Nan Goldin)보다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실상 김옥선과 피사체의 관계는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작가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대상을 찍는다는 점에서는 낸 골딘을 떠올릴 수 있지만, 타인을 찍었든 자신을 찍었든 모두 일종의 자화상인 골딘의 사적 친밀감은 김옥선에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관계없는 타자지만 일정 부분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완전히 동조하지는 못하고 거리감을 유지하는 아버스의 태도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하지만 끝내 관찰자로 남는 김옥선과 접점을 지닌다. 동질감에서 출발하되 거리감을 유지하는 모호한 중간성은 사진의 연출에서도 드러난다. 《Hamel’s Boat》나 《No Direction Home》에서 피사체의 의상이나 포즈는 해당 인물이 직접 선택한 것으로 피사체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작가의 연출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작가는 피사체를 자연스럽게 놓아두기는 하지만 가끔 원하는 장면이 나오도록 포즈를 지시하기도 하고 분위기를 유도하기도 하며 물 밑에서 조용히 상황을 이끌고 통제한다. 작가든 해당 인물이든 원하는 상황을 꾸미되 인물을 왜곡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방식은 연출 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진 사이의 태도다. 이 기묘한 중간성은 신작에도 반영된다. 언급했듯 사진은 피사체를 가까이 찍어서 관객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좁혔고, 조도를 통일하지 않아 형식을 조율한 이전 작업보다 외견상 더 풀어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혼혈 청소년들을 여전히 모르겠고 다가가기 어렵다. 그것은 피사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던 소품들이 제거된 채 인물의 얼굴만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집안의 인테리어와 의상을 통해 인물의 취향과 성격,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던 《No Direction Home》이나 《Berlin Portraits》와 달리, 관객은 혼혈 청소년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일절 짐작할 수 없다. 캡션에 이니셜 일부와 피사체와 관련된 숫자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은 인물 개인의 배경을 짐작하기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추상적 언표일 뿐이다. 결국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이 청소년의 남들과 다른/다를 경험을 암시하는 혼혈의 흔적이 배인 얼굴뿐이다.  


5. 이제 질문은 이번 신작이 초상 사진인가로 겨누어져야 한다.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는 인물 사진임이 분명하다. 사진에서 인물 외의 다른 요소를 최소화하고 이전보다 인물을 더 강조해 찍은 사진이니 분류하자면 초상 사진이 맞다. 그런데 이 사진들은 누구를 보여주고 있는가? 물리적으로는 ‘xenchang’이나 ‘hena’라는 이름을 지닌 실존하는 어떤 인물이 표면에 존재하고 있지만, 관객은 사진을 보기 전이나 후나 ‘xenchang’과 ‘hena’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세부가 잘 드러나게 찍고 대형으로 인화해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자세하게 얼굴을 보고 있지만, 이 아이가 혼혈인 것 같다는 점 외에 인물은 여전히 가려져 있다. 이런 식의 초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토마스 루프(Thomas Ruff)의 《Portraits》(1981-85)를 감상하는 경험과 유사할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는 이보다 더 잘 볼 수 없으나 볼 수 있는 것은 표면뿐이니 말이다.3)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가 보여주는 것은 각자 다른 배경과 사연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인물이 아니다. 대신 떠오르는 것은 ‘혼혈’이라는 추상적이고 집합적인 모호한 개념이다. 민족이나 인종처럼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유효하고 여전히 생활 세계를 지배하지만, 실체를 밝히려고 할수록 명료한 구분이 불가능하고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지는 기이한 개념 말이다.

 앞서 피사체와의 가깝고도 먼 김옥선 특유의 중간적인 거리감에 대해 언급했지만,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독특한 대상성도 김옥선 작업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특징이다. 김옥선 사진의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과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연작에 흡수되면서 개인으로서의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인 타자성을 지시하는 한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연작이 반복되며 개인이 휘발된 자리에, ‘제주에 사는 이방인’, ‘파독 간호사’, ‘국제 결혼 커플’, ‘혼혈 청소년’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이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김옥선 사진은 복수성이 중요하며 그렇기에 연작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유형학과도 맞닿는다. 다만 김옥선의 타자성 연작은 베허 부부(Hilla and Bernd Becher)의 유형학보다는 형식적으로 자유롭고4),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의 작업처럼 전체를 아우르려는 아카이브적 욕망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유형으로 규정하기에는 느슨하고 개별적이지만, 개인이라 말하기에는 추상적인 이 모호함이 김옥선 사진의 중요한 차별성이다.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에서 보편성과 구체성 사이에서 진동하는 김옥선 특유의 모호함은 한층 강화된다. 이미 취향과 성격이 형성된 성인과 달리 아직 정체성이 완전히 성립되지 않아 어디에 속하는지 자신이 누군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청소년 특유의 불안정함은 신작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충혈된 눈이나 여드름 자국, 서툰 화장을 샅샅이 바라보면서도 이 아이들에 대해 짐작할 수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얼굴이다.  


6. 혼혈이라는 타자성은 무엇인가? 이 청소년들의 얼굴 자체가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혼혈의 애매한 실체를 증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꺼운 입술과 뭉툭한 코, 커다란 눈처럼 동양인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외양으로 혼성을 짐작할 수 있는 얼굴도 있지만, 외모만으로는 전혀 혼혈인지 알 수 없는 얼굴도 있다. 이들이 혼혈이라는 사실은 연작의 다른 얼굴들을 보고서야 추론 가능하다. 오직 보이는 것은 얼굴뿐인데 얼굴로도 정체성을 짐작할 수 없다면 우리가 보는 얼굴은 실상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텅 빈 기호다. 혼혈의 실체 역시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해 순혈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혼혈도 실상 의미가 없는 구분이다. 타자성 역시 동일하다. 자아는 타자 없이 성립되지 못하며 타자는 나와의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상대적이고 임시적인 개념이다. “그녀를 보자 당신은 그녀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어떤 것이었을지 당신은 알게 된다. 당신은 비스듬히 눕고, 당신은 깜박 졸고, 당신은 넘어지고, 당신은 전에 본 적이 있는 것들을 다시 눈앞에 본다.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반복된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 당신은 그녀이다. 그녀는 당신을 말한다. 당신은 그녀를 말한다. 그녀는 말하지 못한다.”5) 우리는 펭링, 후안, 수진, 한나를 본다. 우리는 그들이 아니지만 동시에 그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만 그들을 알지 못한다. 얼굴들은 모두 다르지만 동시에 같기도 하다. 이 얼굴은 무엇을 바라보는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나?

1) 차학경의 작품 DICTEE(1982)의 한 구절인 “IN NOMINE LE NOM NOMINE”(이름으로 그 이름 이름)에서 착안해 지었다. 차학경(김경년 역), 『딕테』 (서울: 어문각, 2004), 31쪽. 


2) 김옥선 인터뷰, 2021년 7월 23일. 


3) 물론 김옥선은 인물을 사물로 대하지 않으니 피사체와의 거리 설정에서 루프와 전연 다르다. 


4) 한 연작 내에서 인물의 포즈와 프레이밍의 다양성은 김옥선 작업 일반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5) 차학경(김경년 역), 『딕테』 (서울: 어문각, 2004), 118쪽. 

둘의 대치, 그리고 함께 있을 뿐인 사랑

양효실


다문화가족 - 일반론

인구통계청의 자료조사, 관련 연구를 참조해보면 가부장제-자본주의의 근간인바 결혼과 출산에 대한 젊은 여성들의 거부감, 동시대 삶의 급격한 변화 등으로 인한 향후 노동 인구의 급격한 감소 해결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주요 당면 과제가 되었다. 더불어 현재 OECD 37개 국가 중 저출산 및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한국 내 결혼의 10%를 국제결혼이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는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외국인의 국내 정착을 위한 다양한 장치, 정책의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뒷받침한다. “국가 간 이주가 상시적이고 일반적인 흐름이 된 상황”에서 정부는 더 이상 기존의 동화주의 일변도 정책을 고수할 수 없게 된 것이고, 선진국의 다문화주의적 정책을 적극 수용할 때가 되었다 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증가한 국제결혼은 주지하다시피 동남아시아/남아시아 출신 이주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2008년 다문화가족 지원법의 제정은 그런 변화를 반영한 정책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다문화가족’이란 신어는 단지 아시아뿐이 아니라 선진 유럽 및 북미, 남미, 아프리카 등 거의 모든 곳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이들과 한국인이 만드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포괄하면서, 초기의 명확한 규정성―“출생 국민과 결혼 이민자 또는 귀화자로 이루어진 가족”―을 초과하면서 느슨해지고 있지만, 다문화가족의 표상이 한국 남성과 아시아 이주 여성의 결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애초에 다문화주의라는 중립적인, 또는 서구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개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문화가족이란 신어는 그러나 이곳의 현실과 맞물리면서 ‘정상’ 가족의 주변부를 부르는, 뭔가 열등한 가족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지각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화주의는 여전히 득세하고, 차이와 다양성의 경험이 부족하거나 인식의 변화를 거부하는 내부자들에게 다문화가족은 문화적/상징적, 경제적 자본을 불충분하게 획득한 소수자 집단을 가리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호칭으로 정착된 것이다. 다문화가족은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엄존한 현장, 외부의 차별로 의해 고립된 사각지대, 그럼에도 어떤 문화의 소통/교환이 일어나고 있는 경계, 새로운 가족관계가 가족주의를 밀어내고 있는 변화와 생성의 장소, 친밀한 관계가 곧 문화적 접변이 일어나는 바깥인 역-공간(liminal space)으로서 어떤 하나의 규정성이나 관점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그런 드넓은 곳임은 분명하다.


다문화가족 내 옥선의 자리 

1998년 국적법이 개정되기 전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은 한국에서 거주권과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했고, 가족을 임시 방문하는 권리(방문 동거 비자)만이 주어졌다. 개정 이후 외국인 남편은 결혼하고 2년의 유예기간을 거친 후 일정 자격을 갖춘 경우에 한해 귀화를 신청할 수 있었다. 이후 국적법은 계속 새로운 조항을 첨가하면서 바뀌었고, 국제결혼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해온 듯하다. 2008년 다문화가족법의 시행 이후 다문화가정은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결혼이란 표상에 감춰져 있던 많은 내부의 차이들, 가령 탈북자들이 이룬 가족이나 한국 여성과 외국인 남성의 가족도 포함하는 느슨한 용어로 그 외연을 넓혀갔다. 그전까지는 부계혈통에 기반한 국적법상, 어머니의 나라인 이곳에서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도 아이는 법적으로 한국인이 아니었다. 아이는 한국 여성이 사생아로 자기 호적에 넣지 않는 한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이곳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옥선은 딸 한나가 아버지의 성을 따른 외국인 신분에서 자신의 성을 따른 내국인의 신분으로 바뀐 것이 한나가 유치원 다닐 무렵(아마도 2003년 국적법의 변화를 가리키는 듯하다)이었던 듯하다고 술회한다. 정책 입안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공적 기록에 근거하여 변화를 추적하는 연구자나 활동가들과 달리 당사자, 직접 부딪히고 겪는 이들의 기억과 경험을 말하는 방식일 것이다(자신의 ‘소속’이 달라진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나는 김한나를 ‘인터뷰’해야 할지 모른다. 같은 데서 다른 성으로 불리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나는 내가 아는 기존의 은유나 유비로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런 낯선 경험이나 어려움이 종국에는 한나에게 선물로 변할/변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다. 감히. 가부장제에서 교환되는 여성이 모계제를 함축한 어머니의 성 아래에 놓이는 사건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된, 이 기이한 경험을 나는 뜻밖의 선물, 기회로 감히 해석한다). 

옥선의 삶과 작업을 요약한다면: 독일인 남편과 결혼하고 연고가 없는 제주도로 25년 전에 내려가고, 제주도민의 육지인에 대한 차별―이것의 역사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하고 또 다루지 않는다 ―을 이중으로 겪었을 것이고, 제주도가 육지인이나 대륙인의 투기에 휩싸이는 현장을 목격했을 것이고, 자신을 닮은 야자수를 발견하고 찍었을 것이고, 자신의 가족처럼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끌어안고 사는 부부의 실내풍경 등등을 찍었다.

다문화가족이 애초의 규정성을 상실하고 거의 모든 주변부를 포괄하면서 내가 보기에 있으나 마나 한 용어가 되어 간 것처럼, 옥선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변부적 존재나 삶을 지시적 이름이나 제목 없이, 그저 전시를 아우르는 하나의 제목에 의탁해서 가시화된다. 가령 “고은사진미술관 연례기획 중간보고서 2016”란 부제를 달고 있는 사진집 『순수박물관』은 제주도의 ‘선주민’이나 제주의 자생적인 식물이 빠진 제주도, 어쩌다 그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거의 모든 다양한 포지션이 ‘기원/정체성’으로서의 이름이나 제목 없이 무한히 나열되는 편집/구성 방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제주도가 가까운 열대이기를 열망하는 이들에 의해 강제로 이식되어 제주도의 상징이 된 워싱턴야자 수의 생존이나 번성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기이해 보이듯이(가령 아프리카에서 카리브 해로 강제이주 된 사탕수수농장의 흑인들, 그들의 후예들과 유비시켜도 될까?), 한국으로 경제적 이유로(그러므로 타의로?) 들어온 이주 노동자들이나 지구-행성을 유랑하는 이방인들의 ‘가시화’을 통해 등장한 제주도는, 경제적 이유로 들어가서 작가적 시선으로 발견한 옥선의 제주도일 것이다. 옥선의 사진은 문화인류학적 기록사진이면서 자기 자신이 등장하는 ‘고백적’ 사진이다. 옥선은 내부자로서 ‘우리’를 유출할 뿐 아니라 연구자/보는 자로서 자신이 속한 문화의 집단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왜 자기 자신을 찍은 것이 친밀한, 주관적인 사진의 특이성을 성취하는 데 만족하는 게 아니라 가장 친밀한 사진이 공적인, 역사적인, 객관적인 기록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이고, 자신이 속한 소수자 집단에 대한 정치적 재현, 표상을 거부하는, 즉 소수자의 시각적 ‘정체성’/이미지화를 슬쩍 건너뛰는 ‘미적’ 사진이다. 내부의 이방인, 전 지구적 유랑이나 이주는 옥선에게는 글자 그대로의 삶이고, 그는 늘 자기 이야기를 해왔고, 그 이야기는 친밀한 내부와 낯선 외부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구조화됨으로써 고백과 기록이 뒤섞인 역-공간을 경유해서 들려졌다. 사진은 가장 재현적인 매체라는 점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찍는 행위라는 점에서 근대적 재현 체계가 노정한 가시성의 이데올로기의 볼모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혹은 위반적인 태도를 전담했던 다큐멘터리 기록 사진이 오늘날 식민적, 가부장적, 자본주의적 점유와 전유에 투항하고 말았다는 일반론은 거칠고 성기기는 하지만 경청할만한 사실이다. 보이고 읽히면 이미 분류체계에 들어갔다는 것이고, 동화와 통합에 유리하게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기록 사진은 무엇보다 진짜, ‘있(었)음’의 단서/증거로 제출됨으로써 가짜를 발굴하고 제거하려는 헤게모니적 인식욕에 동원된다. 그럼으로써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미적으로 유희하고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사진작가의 자리를 자꾸 지워버린다. 옥선의 사진은 마치 진짜 사람과 나무, 거기에 그때 있었음을 찍은 것처럼 제시되기에 기록사진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에는 관심이 없는 옥선에게 중요한 것은 “안 어울리는 데 있는 것”을 기록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혼성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것이다. 국제결혼을 한 부부의 실내공간은 둘이 하나라는 이상적인 ‘망상’이나 셋이 되는 물리적인 생산에 바쳐진 무대가 아니라 둘이 끝끝내 둘일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실재적인’ 대치와 협상의 무대로서 재구성된다. 옥선의 야자수는 옥선의 말처럼 “도로변,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들”이다. 육지인이자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이중적 ‘소외’를 투사해서 전유한/구성한 대상들을 하나의 고립이나 둘의 대치를 통해 장면화하는 옥선의 사진은 ‘보는 눈’의 쾌락을 그다지 만족시키지 못한다. 옥선의 사진은 내가 보기에는 밋밋하고 슴슴하고 고요하다. 소수자 공동체를 외부로 유출하는 인류학적/민족지학적 사진이 노출하는 내부의 매력(인식에 기여하는)이라든지, 사적인 것이 노출되었을 때 압도하는 정동 같은 것이 없다. 있는 것은 어떤 얼굴들, 해석 불가능한 상황들, 너무 평이해서 지나쳐도 좋을 것 같은 ‘일상’이다. 그렇게 있다는, 여기에 있다는, 가시적으로 식별되는, 타자에 대한 정보나 보는 자의 미적 쾌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찰자의 개입을 뺀 채로 있(었)음이 찍혔다. “예술을 자처한 것은 아니지만 미술관에 있다”는 옥선의 말은 어느 순간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 작가가 된 것에 대한 어정쩡한, 큰 동요 없는 인정을 고지한다. 

물론 현재 미술관이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위한 배경, 풍경으로 바뀌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무나 많은 사진들, 누구나 찍는 사진들, 너무나 많은 내용과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서 사실은 텅 빈 사진들, 물화된 스펙타클들, 압도하는 (포르노적) 시선들, 죽은 이미지들, 포식과 탐식 중에 혀는 사라진 미감들, ‘웰메이드’가 잠식한 나라, 마비된 감각들...


한나와 친구들, 야자수              

나는 아직 다문화가정 출신 학생을 만난 경험이 없다(매체와 정보로서야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그러니 사실은 모른다). 다문화가족을 연구한 논문들에서 ‘그들’은 인터뷰이로, 두 문화 사이에서 수치심이나 불안을 느끼는 존재로 재현된다. 나는 영국의 역사적 하위문화를 떠올리며, 그것과 유비 시키며 다문화가정 내 청소년들이 제시할 하위문화를 상상한다. 연구에 따르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학생 수는 감소한다. 그들은 문화의 융합이나 문화로의 적응에 실패했거나 여러 샛길로 이탈하고 있다. 그들이 내부의 이방인이라는 데, 그들이 말하자면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리라는 데는 별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듯도 하다. 이질적인 것, 차이를 못 견뎌 하는 우리의 동일성 주의가 그들에게 생채기를 만들고, 그 생채기가 그들을 문제로, 세력으로 이끌 것임은 역사가 알려주는 교훈 혹은 정보이다. 

옥선이 다문화가정 청소년을 찍은 두 개의 연작 《Riverside Portraits》과 《Park Portraits》는 기록 사진이면서 옥선의 딸 한나가 등장하는 1인칭 고백적 사진이기도 하다. 두 개의 범주가 나란히 함께 작동하는 사진 연작에서 한나가 등장하는 《Riverside Portraits》은 서울 근교에서 3월의 강변을 배경으로 찍은 인물 초상이다. 한나는 다른 여성 청소년들이 대부분 정면으로 찍힌 데 비해 유독 측면으로 등장한다. 가장 가까운 타자인 딸, 그러므로 가장 쉽게 전유할 수 있는 대상을 찍은 사진 중 측면 사진을 선택, 전시함으로써 옥선은 손쉬운 동일시,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을 가진, 사랑하는 타자와의 거리, 긴장을 표지한다. 가족은, 부모와 아이는 가장 서로를 모르지만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친밀한 타인들이다. 엄마의 사진집에 가족사진도 아닌 ‘집단적’ 인물 사진에 어떤 표상이나 이미지로 등장하는 딸. 국제결혼 당사자와 2세들 사이의 거리는 주관적인 사진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객관적인 사진으로 전치되어 있는 한나의 사진의 구성방식, 혹은 여러 사진 중 선별된 이 사진에 의해 신중하게 보유된다. 나는 이런 사진을 그래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 것임을, 그 둘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끝없이 발견하면서 그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나의 친구들, 혹은 건너 건너 알게 된 다문화가족 청소년들이 겨울과 봄, 죽은 풀과 돋아나는 풀들이 뒤섞인 강변에 앉아 있다. 자신을 포함한 다문화가족 부부를 옥선은 두 문화가 물건들을 통해 뒤섞인 채 가시화되는 실내에서 찍었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바깥에서, 과도기적인, 쓸쓸하면서 황량하면서 어떤 삶의 기운이 서서히 번져나가는 3월 강변에서 찍었다. 옥선의 해석, 구성 안으로 아이들이 배치되었다. 아이들은 인스타용 사진, 혹은 그보다 더 멋진 인스타용 사진을 사진작가에게 원했을지 모르지만, 옥선은 아이들이 ‘원하는’ 구도, 표정, 자세가 아이들의 ‘겉’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마침내 이렇게 빈, 뻣뻣한, 고요한, 죽은 풀과 돋아나는 풀 사이에 있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대상으로 변한 아이들을 찍었다. 눈여겨 자세히 보아도 우리랑 별로 다를 게 없는, 사진작가가 포착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보기엔 별 게 없는 듯한 사진 같고,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라고 작가에게 물어보기도 좀 애매한 사진. 마치 너무 많은 말 때문에 사진은 사라진 사진(스투디움?)은 아니려는 것 같고, 다문화가족 청소년이란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아젠다에서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것 같고, 3월 강변의 풍경을 청소년기의 알레고리로 전치한 것 같고,..... 말 없는 제스쳐나 마침내 말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만이 비로소 말을 할 자격이 있다면, 텅 빈말이나 이미지만이 말한다는 게 맞다면, 이렇듯 고립과 비우기와 노출을 통해 온전히 옥선의 대상으로 바뀌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원하는 정보나 감정, 기대와 불안에서 멀어진 채로, 오직 옥선이 꾸민 무대에 있었음이 증거로 남은 아이들의 이미지적/표면적/사진적 차이를, 차이의 나열을 보고 들을 귀나 눈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푸코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놓고 말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옥선의 사진, 옥선이 내부의 외부자로서 유출하는 다문화가족의 상태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게 된다. 

 

마그리트는 유사(ressemblance)에서 상사(similitude)를 분리해내고, 후자를 전자와 반대로 작용하게 하는 것 같다. 유사에게는 <주인(patron)>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 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되풀이에 쓰이며 되풀이는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 유사는 전범(modèle)에 따라 정돈되면서, 또한 그 전범을 다시 이끌고 가 인정시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부터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모의(simulacre)를 순환시킨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미셸 푸코, 김현 옮김, 민음사, 1995, pp 72~73)  


상사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비슷한 것들이 무한히 되풀이되면서 근원/주인/전범 없이 떠도는 유랑하는 이미지들, 기표들, 사본들의 장소/현장을 말한다. 상사는 집에 도착하지 않을 것이고(《No Direction Home》, 2010년 사진 연작 제목), 비슷할 뿐 닮지는 않은 이미지들, 기호들이 재생하는 가짜/모의에 충실한 것이다. 

옥선은 대만의 가오슝 아트 레지던시에 있을 때 그곳의 다문화가족 청소년들을 섭외해서 자신의 분신이자 알레고리적 표상이라 할 수 있을 야자수를 배경으로 찍었다. 중국과의 외교적 교류가 재개되고 전 지구적 이주의 일환으로서 주변국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우리보다 10년 정도 먼저 다문화가족이 급증한 대만에서 옥선은 한국과 비슷한 상황, 비슷한 얼굴을 보았다. 다른 곳에서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역사와 타자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를 알아보는 것, 그것을 나의 가장 친밀한 이방인인 딸의 반복이자 확장으로 배치하는 것, 이들이 앞으로 일궈낼 공동체나 내부는 설치하지 않은 채 대신에 작가 자신의 분신인 야자수 앞에 슬쩍 데려다 놓는 것, 그들은 모른 채 들어간 어떤 ‘내부’가 신중한 의도하게 배치되었다는 것, 인류학적 사진인 듯 그러나 사실은 어떤 정서가 배어 있다는 것, 이걸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우기는 것에 진배없다는 것, 아이들은 홀로 고립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둘이라는 것, 옥선의 둘은 곧장 융합으로 수렴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게 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면 설명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여성-엄마-작가 옥선이 연출한 모계장적 사진의 형식 같다는 과잉의 해석을 밀어 넣는 것.    

그리고 아이들은 등장하지 않는, 야자수만 나오는 사진. 종교 의례에 사용되었던 종교화인 삼면화 형식을 차용해서 함께 걸린 채, 파노라마 사진인 척하는 사진. 파노라마적 사진이나 전체의 표상에 대해 들쭉날쭉한 모서리들, 이음매들을 보여주는 세 개의 사진으로 대적하는 것. 융합과 동화에 계속 말을 걸고 대거리하는 것. 위계화 된 재현에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대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