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류 Solo exhibition

<B형 비염 귀염>

23. Aug - 18. Sep 2022


관계, 경계, 고개


 본다, 그림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내게서 말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그 사이엔 무한한 시간이 점멸하고 있다.

 시간,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플랑크 시간(Planck time). 시간의 가장 최소 단위라 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더욱 어렵다. 진공이란 낮은 에너지가, 엄청나게 낮은 확률로,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벽을 뚫고 가며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할 때의 시간을 표현한 단위란다. 

이길 수 없는 벽을 뚫고. 

 나는 그 수사적(rhetorical) 문장에 꽂힌다. 어쩌면 내게 서문이란, 작품의 순간적 나타남을 수사적 수사(rhetorical investigation)로 얼버무리는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작품은 가뿐히 말들을 젖힌다.


알리바이 1 : 관계

 처음, 작가는 폭주족이나 컬트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점점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며 찍은 스냅 사진으로, 또 자신이 장면을 계획하고 촬영하는 연출 사진으로 변화했다. 이번 전시 작품들에선 다른 작가의 퍼포먼스 작업을 참고하여 그려졌다. 점차 먼 거리의 풍경에서, 차츰 뒷모습으로, 바라보기에서 마주보기로의 이행이 관찰된다. 대상의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타인의 세계로 기꺼이 다가간다. 그것도 작업이라는, 매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공간으로 움직인다. 관조의 시선을 벗어났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가 안전하지 않음을 뜻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감정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이다. 그렇기에 이번 그림들은 감정의 지문을 남긴다. 이것은 단순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파동이 중요하다. 자신과 타인의 세계의 부딪힘처럼, 순간적인 '퍼포먼스' 작업이 '평면'이란 세계와 부딪히며 진동이 일어난다. 특정적 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졌고, 사진은 그것의 흔적으로 기능한다. 작가는 이 흔적들과 함께 사건의 복원과 왜곡의 사이에서 회화라는 또 다른 매체적 진동을 만난다. 붓은 캔버스라는 벽에 계속해서 물감을 튀긴다. 붓은 젖혀진다. 잔해들은 색과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기의 움직임을 살피자면, 그것은 뚫지 못하는 것에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것에는 분명, 어떤 표정이란 떨림이 있다. 흔들림이 있다. 마치, 이길 수 없는 벽을 뚫고 있는 것처럼.


알리바이 2 : 경계

 작품의 표현 방식이 갖는 구체성 때문에, 우리는 어떤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수상하다. 그런 장면들의 연속성이 여기 놓인 작품들에선, 더는 작동되지 않는다. 타임라인 안에서 빠져나온 동작들은 분명 어떤 움직임을 내포하면서도 정지해 있다. <Cave Time>과 <Ambush Ⅰ>, <He’s getting too Clingy>등 대부분의 작업에서 색이 갖는 지분은 커 보인다. 나는 거기서 매끈한 블루와 축축한 블루, 그리고 반짝이는 블루를 보았다. 그리고 그 블루들을 선명하게 지나가는 붉은색의 <Caveman>, <Chroma Key Green,>, <Durable and Scary>의 대비가 보인다. 이렇게 내러티브를 벗어난 움직임은 색을 통해 어떤 단서들을 흘리는 듯하다. 색을 따라가면 표정이 보인다. 미묘하게 주름이란 각도가 생긴다. 우리는 곧 의심한다. 가면 뒤에 있을 얼굴에 대하여. 그러나 가면이란 사실 가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어딘가에 있다고 안심시키는 쪽에 가깝다. 회화가 가진 피상성은 내용과 시간의 순서에 따라 흘러갈 내러티브가 찢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자주 사용된 'Cave'란 제목도 이와 비슷하게 작동된다. 그것은 라스코도 카타콤도 아닌 어딘가 축축하고 후미진 '짙은 갈색'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곳은 소리가 울리지만 깊이가 없으며, 깊이가 없음에도 진동이 계속된다. 그렇게 케이브 맨(Cave man)은 가면 뒤에 숨고, 가면은 이미지 뒤에 숨는다. 그것은 깊이가 있다고 가리키고, 도망가며,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서 볼륨(Massiveness)을 갖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평면이란 경계다. 이미지 그 자체다. 마치 물리적 시간을 걷어낸 운동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찰나를 만든다. 말들을 비약하게 한다.

 전시 제목 역시 연상법이란 아주 미약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비형-비염-귀염. 서로 상관없는 대상들이 단어의 형태적 유사성으로 느슨하게 걸쳐져있다. 마치 그림이 세로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가로로 나열되는 것처럼. 그러나 어쩌면, 언어로 점철된 세계에서 이미지가 말하는 방식은, 이런 아무 관련 없는 형태적 유사성에 의해 잠시 해석되었다가 놓치는 순간에 가깝지 않을까.


알리바이 3 : 고개

 재밌는 지점은 작업의 단서가 될 수도, 조작된 알리바이가 될 수도 있는 '편지'의 등장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퍼포먼스 작가와 그 작업을 그린 작가는 서로 서신을 교환한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들이 함께한 풍경과 다른 인물들의 사소한 잡담들이 담겨있다. 편지는 결국 상대에 관한 질문이 아닌,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러나 각자의 편지가 공개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묘하게 자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서로를 향하고 있다고 느꼈다. 자기 독백이자, 타인의 고백이 되기도 하는 이상한 상황. 작품에서 역시 교환의 시선은 계속된다. 그려진 대상의 눈길은 아래로, 그것을 관찰하는 시선은 위를 향하는 움직임이 발견된다. 이것은 곧 그림이 그려지는 행위와 비슷하다.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에 의하면, 그리기의 몸짓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세계 속에 홀로 있지 않으며,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우리 주위에서 타인의 몸짓들이 우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려지는 그림은, 이 몸짓이 그림을 그림으로써 '주는' 의미이고, 그려지는 그림을 선취함으로써 '갖는' 의미이다. 화가는 이 몸짓 속에서 자신을 실현한다.

 그림은, 그려지는 행위를 통해 의미의 주고받음이 계속된다. 그것은 자기 순환적이 아닌, 외부로 타인의 세계로 향한다. 작가의 기다림은 그곳에 있다. 일상과 주변에서 튀어 오르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시간 속에 잠복한다. <Durable and Scary>에 등장하는 심장처럼, 그것은 어딘가 우스꽝스럽고도 튼튼한 공포다. 끈적거리고 축축한 맞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이길 수 없는 벽을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루한 대기 속에 무언가가 점멸하며 통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