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

정재호 작가


을지로의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정재호 작가의 을지로 풍경들은 제자리에 놓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상업화랑 을지로에서 12월 27일까지 진행되는 전시 《창과 더미》는 동양화 재료로 작업해 왔던 정재호 작가의 유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첫 기회이기도 하다. 작가가 을지로 지역을 바라보는 시각은 무엇인지, 동양화와 유화의 매체적 차이는 어떻게 체감되는지, 재료 변화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지점은 어디인지,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창과 더미》전시전경  (사진제공: 정재호 작가)

#을지로에 관한 질문


Q. 이번 전시에서는 을지로 재개발 지역의 실경을 바탕으로 작업하셨는데이 지역에 집중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A. 2018년 올해의 작가상에서 을지로 4구역을 내려다보는 큰 풍경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 작업 이후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의미, 늘 갈등이 있어왔던 곳이고 최근 재개발과 관련한 첨예한 갈등이 대두되는 곳이라는 데 대한 관심사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 이곳의 풍경이 가지고 있는 압도되는 힘 같은 것이 있었어요. 을지로 풍경을 사회적·정치적 풍경의 의미에만 국한해 이야기한다면 너무나 협소해지는 것 같고, 역사와 시간, 인간에 대한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밀집되어 있는 듯한 느낌에 총체적인 충격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를 그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를 그리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최근 3구역 지역이 급속도로 재개발되면서 그 지역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어요. ‘사라지기 전에 지금 빨리 그려야겠다.’ 생각하고 이번 전시에서는 세운상가를 중심에 두고 그 주변 지역만 그리게 된 것입니다.


전시 제목은 을지로의 풍경을 '창과 더미로 비유하셨는데제목의 결정 과정과 의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창과 더미>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이 작품의 풍경은 세운상가에서 망원렌즈로 을지로 뒤편을 찍은 사진을 크로핑(cropping)하여 잡아낸 장면입니다. 전경에 있는 각목과 그 뒤에 있는 옥상 난간(더미가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건물은 몇 십 미터씩 떨어져 있지만 사진을 당겨 찍다 보니 한 장면에 뭉쳐져 나오게 되었어요. 사진을 자르는 과정에서 날카로운 각목이 사선으로 사진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게 느껴져서 저 정도에서 잘라냈고, 그리다가 뒷부분에 있는 더미들을 발견했어요. ‘이 그림의 가장 결정적인 두 가지 요소는 저 각목과 더미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리다가 문득 저 각목 끝이 뾰족하게 잘라져 있는 걸 보고 창을 연상했고요. 그렇게 그림 제목이 ‘창과 더미’로 지어졌습니다.

이 그림 제목을 전시 제목으로 삼은 것은 ‘창’에 저항의 의미를 담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철거가 이루어지면서 슬레이트 지붕이 걷히면 나무 골조 같은 것들이 드러나고, 그게 다 부러지면서 굉장히 날카로운 부분들을 드러내는데, 그게 한편으로는 저항의 의미로 읽혔어요. 그리고 철거 과정에서는 수많은 ‘더미’들이 생기게 됩니다.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건물이 헐리면 낮은 언덕 같은 것들로 쌓아 놓게 되지요. 그런 의미를 생각한 것입니다.

창과 더미 Spear and Heap, oil on canvas, 162×112cm, 2020.

이 지역이 재개발되기 이전의 기억들이 있으시다면 공유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강북에서 태어난 강북 토박이인데, 어렸을 때 이 세운상가를 자주 왔었어요. 당시 세운상가는 용산전자상가 같은 그런 곳이었고(지금은 용산전자상가도 한물 가버렸지만요), 어린 남자아이들에게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던 것 같아요. 건물도 인상적이었고,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이 세운상가 건물들이 쭉 지나가는데, 그게 SF 영화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아세아극장이 있어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2층 데크에 가면 자질구레한 전자제품들을 쌓아 놓고 파는 모습들, 그런 것들이 너무 재미있었던 거죠. 그런 추억을 한동안 잊고 지내다, 미술 작업을 하게 되면서 도시에 관심을 두다 보니 이 지역을 다시 찾게 되었어요. 이전에도 청계천의 삼일고가를 중심으로 한 풍경을 그렸었고 아파트 작업을 하면서도 이 일대에 있는 삼일아파트를 그리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이 지역만 본격적으로 그리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인 거죠.


젊은 세대에게 을지로 지역은 힙지로로 불리며 레트로 감성의 대표주자로 손꼽히기도 하고상가에도 새로운 감성의 카페와 식당들이 들어서 있습니다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최근에 불과 1~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인 것 같은데, 대림상가, 세운상가에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고, 젊은이들이 와서 데이트를 하거나 이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면서 즐기기도 하는데 저는 그게 보기 좋더라고요. 이 지역이 그 전에는 하나의 단어로서 이곳은 어떤 곳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었다면, 다양한 세대의 문화가 섞이면서 이곳이 다양한 얼굴들을 갖게 되잖아요. 이것이 서구적인 것도 아닌 것 같고, 자본화된 프렌차이즈도 아닌 것 같고,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감수성이 생기는 것이 좋아 보여요.


젊은 세대에게 오래됨이 남아있는 지역은 추억이 아닌 생경함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을 데리고 이 지역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재밌어하기도 하지만 첫째로는 굉장히 놀라워하고 충격을 받기도 해요. 뭐 이런 풍경이 있나 하면서요.


#작업, 매체, 전시에 관한 질문


이번 전시 작품들은 모두 유화를 사용하셨습니다그 계기나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 10년 전에 한동안 유화를 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발표한 적은 없지만 유화를 처음 접하면서 재미와 자유로움을 느꼈고, 이후에는 한 곳에 유화 재료를 몰아 놓고 안 쓰고 있었는데요. 이번 작업을 시작할 때 제가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를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나는 어떠한 ‘질감’을 계속 그리고 싶어 했고,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어서 재료를 쓰는 방법을 계속 연구하고 바꿔 왔다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질감 표현에 가장 효과적인 재료를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렇게 유화 재료를 다시 꺼내서 그리게 되었습니다.


유화 재료가 이 지역의 질감을 살리는 데 적합하게 다가오셨던 거네요이전에 사용하시던 동양화 재료와 비교해본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네, 그렇죠. 그림을 그리는 태도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화는 '표면을 직접 쓸고 다니는' 느낌인 것 같아요. 동양화가 실루엣을 잡아 나가는 상태에서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아가면서 대상을 표현한다면, 유화는 붓질 하나하나가 바로 어떤 물질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벽돌이면 벽돌, 시멘트면 시멘트의 질감이 직접적으로 손에 와 닿는 느낌이 있어요. 앞으로는 필요한 느낌에 따라서 거기에 맞게 재료를 바꿔 가면서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풍경이 있다면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이 풍경 <소리를 듣는 곳>이 마음에 와 닿는데, 조금 고생스럽게 그리기도 했고요. 다른 그림들은 공간이 막혀 있는 반면에 이 그림은 굉장히 먼 공간까지를 표현하려고 한 것인데, 그 느낌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요. 공간을 멀고 깊게 표현하고자 하다 보니, 물감으로 풍경을 제대로 그린다는 게 단순히 사진을 보고 그리는 차원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면서 나름대로 공부가 많이 된 그림이에요.

소리를 듣는 곳 A Place to Hear Sounds, oil on canvas, 162×112cm, 2020.

풍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방식의 그림이 작가님께 의미가 있었던 거네요.

네. 이전 작업들을 쭉 보니까 저는 굉장히 넓은 풍경을 그리는 것을 아주 옛날부터 좋아했더라고요. 데뷔 시기부터 넓은 풍경으로부터 시작하기도 했고, 풍경을 넓게 내려다보는 시각에 대해서 제 스스로 어떠한 쾌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 산동네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그 동네에 있는 산의 가장 높이 있는 아파트에서도 꼭대기 층에 살았어요. 그 풍경을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보면서 자란 영향도 있는 것 같네요. 항상 이렇게 내려다보는 풍경이 익숙하고 좋게 느껴집니다.


전시 설치 과정에서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셨는지작품의 위치 선정이나 설치 방식이 작품의 내용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합니다.

전시 설치와 관련해 원래 계획되어 있던 것은 ‘2층 공간에 100호 그림들을 배치해서 풍경을 감상하는 시야를 만들어 주자’는 것 외에는 없었어요. 그런데 그림을 가져와서 공간에 놓아 보면서 발견하게 된 것이, 이번 전시에서 그린 을지로 주변의 공간들이 바깥 풍경뿐만이 아니고 실내 공간, 창 이런 요소들이 있잖아요. 그 요소들이 갤러리 안에도 그대로 있더라고요. 1층에는 창문 옆에 창문을 그린 그림을 걸었는데, 우연히도 창문의 크기가 같다든지 이런 일치들이 발생했습니다. 상업화랑에서 내려가는 데에 있는 창문을 그린 것도 있고요. 그래서인지 바깥에 있는 요소들이 갤러리 안에 들어왔을 때 이질감 없이 탁 탁 걸리는 그런 경험을 했어요.

2층 전시 전경.

1층, 창문이 있는 전시 전경.

두 개의 초록 선 Two Green Lines, oil on canvas, 116.7×80.2cm, 2020.

을지로를 그린 그림들을 을지로에 있는 화랑에 걸었을 때 그림과 전시공간의 일체감이 드러난 점이 흥미롭게 다가오네요.

을지로 상업화랑의 특징이 화이트큐브가 아닌 '을지로스러움'을 그대로 남겨 두면서 만든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들과 굉장히 잘 조화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의 작업과 이번 전시에서의 작업을 비교해 볼 때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전에는 작업의 의미에 집중하면서 '전시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어떠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번 전시의 경우에는 막연하게 ‘을지로 풍경을 그려 보자’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그리다 보니 풍경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벅찬 일이어서, 제대로 못 그린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이전의 동양화로는 원래 '있는 그대로' 그려지지 않다 보니,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 재료(유화)는, 각목을 그리면 그림이 각목에 착 붙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사실 묘사에 대한 욕구 같은 것들이 하나의 기준이 되어서 그림을 끌고 가더군요. 그러다보니 이곳을 얼마나 내가 생각하는 ‘정확함’으로 그릴 수 있는가가 중요해졌어요. 스스로 느끼기에 여기는 이런 식으로 그려져야 된다는 그런 정확함에 도달하려고 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시는 정확함이라는 것이 사실적인’ 것 이상의 의미로 느껴지는데요.

사실적인 것도 물론 포함됩니다. 사진을 보고 그린다는 것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사실성을 유지하면서도 사진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있는 것 같고요. 회화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외부적인 요소들보다 그림 자체에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이를테면 정서적인 요소, 회화의 트렌드, 도시의 풍경화와 관련해 부여되는 ‘고단한 삶’과 같은 고전적인 코드를 제외하고 과장과 첨삭 없이 그리고자 하는 것, 외부적인 요소들을 제외하고도 그림이 어떤 힘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가 정확함의 추구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질문으로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예외적인 것이 많았던 2020년에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올해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을 많이 하고 전시도 줄어서 작업실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좀 더 그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그림들도 그려낼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서 그동안 했던 작업들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다른 인스타 계정을 하나 만들어서(@jaehojungpainting) 옛날 데뷔 때 작업부터 역순으로 계속 올려 보고 있어요. SNS에 올리고 보면 객관화되는 측면도 있고, 옛날에 했던 작업을 다시 들여다보면 ‘요즘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그리던 소재 같은 것들이 옛날에 그렸거나 그리려고 했던 것들을 다시 꺼내는 거구나.’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돌아보는 시간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진행/글  김명진 (상업화랑 전시기획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