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영  SOOYOUNG SONG

깃발-나무

Landscape in Things

6 - 20 Jan.  2021

Mullae

Truth to material, again!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중에 송수영이 내게 냉장고에 붙어있던 <전단지-나방 Flier-Moth>(2009)을 보여줬다. 제목 그대로 전단지로 만든 작은 나방의 형상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나방을 꽤 닮았다. 2011년 개인전(신한갤러리)을 비롯한 자신의 초기 전시들에서 송수영은 전단지로 만든 나방들을 전시장 곳곳에 산포했다. 이 작가는 내게 환풍기에 붙인 전단지-나방들이 바람에 파닥파닥 움직이는 현상을 지켜보는 흥미로운 체험을 이야기해줬다. 물론 아무리 나방과 닮았다고 해도 그것은 내게 어디까지나 전단지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처음에 웅크린 고양이처럼 보였던 검은 형상-<비닐봉지-고양이 Plastic bag-Cat>(2009)은 곧 검은 비닐봉지로 나타나고, 비둘기들로 보였던 형상들-<회색눈-비둘기 Grey snow-Dove>(2011)은 어느새 길가에 쌓인 회색 눈 덩어리들로 드러난다. 물론 그것들은 여전히 고양이, 비둘기처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작업들에서 이미지와 재료(사물), 이를테면 나방과 전단지는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경쟁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송수영 초기 작업의 주제이다. 2011년 개인전 도록에 넣은 글에서 이 작가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의 작업에서는 일상의 사물(비닐봉지)과 나의 행위로 인해 그 사물에 형성된 다른 이미지(고양이)의 균형이 중요한 요소이다. 이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작품이 둘 중 어느 하나에도 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인 것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중략) …조합된 “A-not A”의 구조를 가진 어떤 것으로써, A를 바라보는 시선의 관습과 A아닌 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관습을 맞닿게 하고,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다(송수영, 2011).


인용문에서 송수영은 사물과 이미지의 균형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 인용문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재료에의 충실 truth to material”을 외치며 자신의 작품을 기어코 재료, 또는 사물로 보이게 하려고 노심초사했던 옛 거장들의 흔적을 더듬어 찾는다. 인용문은 확실히 “이미지를 보이면서 동시에 재료를 보여야 한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강박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나는 2011년 당시의 송수영의 주장을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깊이 공감한다고 말해야 한다. 작품은 이미지이기 이전에 재료-사물 자체이며 그 재료를 돋보이게 하여 허깨비 같은 이미지와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양심적인 예술가의 과제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2011년 개인전 이후 송수영 작업의 전개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미지/재료’의 이분법 또는 동시적 공존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이 작가의 작업을 포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다소 “집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태도, 곧 집요하게 문제에 매달리는 태도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단채널 영상작업인 <악수>(2018)에서 이 작가는 얼음으로 만든 손을 21분 49초간 끊임없이 어루만지는 손을 보여준다. 그 어루만지는 손의 행위를 통해 나는 그 손의 형상이 사실 차가운 얼음이라는 것을, 아니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어루만지는 손의 행위는 이미지와 함께 사는 재료를 가시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료의 기원을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갔다. 즉 <악수>에서 송수영은 이미지의 재료를 단순한 재료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원-과거를 지닌 재료로 드러냈다. 이렇듯 재료를 “과거를 지닌 재료” 또는 “기억을 간직한 재료”-이 작가의 2012년 개인전(송은 아트큐브) 제목은 <사물의 기억>이었다-로 드러내는 이 흥미로운 태도는 2011년 개인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젓가락-나무 Chopsticks-Tree>(2010), <이쑤시개-풀 Toothpick-Glass>(2010), <면봉-목화 Swab-Cotton>(2010) 같은 작품들에서 송수영은 젓가락과 이쑤시개의 재료인 나무를 ‘이전의 상태’, 즉 새순이나 새싹의 형태로 드러냈고 면봉의 재료를 아욱과 식물인 목화에서 솜이 터진 모습으로 드러냈다. 심지어 <탁자-나무 Table-Tree>(2010)에서 탁자의 재료인 등나무는 “빛을 향해 휘어진” 새순으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나는 “작품은 이미지이기 이전에 재료-사물 자체”라고 썼다. 예컨대 목재로 만든 형상은 그 무엇이기 이전에 목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송수영을 따라 그 목재는 목재이기 이전에 나무, 곧 한 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나무였다고 말해야 한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송수영의 작업에서 재료의 기원이 다시금 이미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미지의 기원으로서가 아니라 재료의 기원으로서 이미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에서 살았던 나무-연필로 그린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2012)이나 최근작인 <쥐라산맥에서 살았던 너도밤나무-연필로 그린 쥐라산맥>(2020)에서 이 작가는 연필로 그 연필의 재료인 나무가 살았던 캘리포니아 삼나무숲이나 쥐라산맥(스위스제 까렌다쉬 연필은 쥐라산맥의 너도밤나무로 만든다고 한다)을 그렸다. 이 작업은 재료인 연필이 닳아서 마침내 제 기능을 담당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됐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연필로 그린 이미지들을 연필과 함께 바라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시점에서 몽당연필은 쓸모있는 재료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누군가는(송수영은)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데 이는 그것이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순간들을 간직할 필요가 있어서일 것이다.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에서 살았던 나무-연필로 그린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이나 <쥐라산맥에서 살았던 너도밤나무-연필로 그린 쥐라산맥>에서 보듯 송수영은 재료를 단순한 재료로 대하지 않는다. 이 작가는 재료와 사물을 늘 시간을 간직한, 그러므로 기억을 간직한 재료와 사물로 대한다. 송수영의 작업에서 몽당연필 옆에 펼쳐진 쥐라산맥의 풍경화들은 죽음에 직면한 인간 앞에 “주마등처럼 펼쳐진” 생의 순간순간들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 작가의 개인전 제목인 “잃는 방법”(2018, 상업화랑), “젓가락 복음”(2019, 상업화랑)은 이런 문맥에서 헤아릴 필요가 있다. <젓가락 복음> 도록에서 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평범한 것들을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다. 이번 전시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다”(송수영, 2019)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에 나무에 달려있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진 그 나무를 우리는 ‘헐벗은 나무’라고 부른다. 한낱 일회용품으로 전락한 나무젓가락은 한 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나무였다. 나무젓가락 포장지에 적힌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같은 문구는 어떤가? 누군가가 ‘텅빈 기표’라 불렀던 것들에는 가치있는 의미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헐벗은 나무에 매달려 힘차게 나부끼는 백기들-<깃발-나무>(2020)은 시간의 흐름에 기꺼이 순응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것들에 대한 찬가이다. 그 앞에서 물성 또는 “재료에의 충실”을 운운하는 일은 좀 더 정중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글. 홍지석(미술비평, 단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