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JAEHO JUNG

창과 더미

Spear and Heap

2 - 27 Dec. 2020

6 - 17 Jan. 2021

Eulji-ro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¹ 

(부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림을 보는 것, 그리고 그림을 아는 것)


저 많은 것들 중에서 붓 자국조차 선명하지 않은 흰 실오라기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고 하면, 나는 실패한 걸까. 거대한 회색 풍경을 꼼꼼하게 그린 그림 앞에서 사라진 세월을 찾고 있다면, 정말 나는 실패한 걸까. 깨진 수채 구멍처럼 주저 앉은 지붕을 위에서 내려다 보며 사랑에 대한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면, 나는 아직도 모르는 걸까. 스물 네 개의 그림을 보는 내내, 나는 이 그림들을 행여 알아볼 수 없어서 괜한 마음을 뒤척이지나 않을까 싶어, 무심한 눈을 부릅떴다.


1. 거대한, 풍경 속에 있는 것들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의 풍경을 “사진처럼” 꼼꼼히 옮겨 그린 그의 그림에서는 어떤 비장함 같은 게 있다.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누추한 도심 풍경의 대기가 계절도 시간도 알아채지 못할 짙은 구름에 물들어 있다. 그림자 조차 허락하지 않은 그 적막함 탓에 눈 보다 육체에 붙은 가슴이 더 뻑뻑해질 지경이다. 빛이라 하기에는 색에 가깝고 형태이기 보다는 물질에 가까운 것들이 큰 풍경을 이룬다고 말하려 보니, 그림에 엉겨 있는 질감이 아까부터 묵직하게 눈동자에 와 닿는다. 그게 그림의 것인지, 그림 안의 것인지, 갑자기 막연해졌다. 정재호는 “물체들에 형태와 색, 질감을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풍경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흡사 건축의 과정과 닮아 있어서 풍경과의 거리감을 해체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건축에 직접 참여하듯 사물들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미술이라는 것, 회화라는 것을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고 풍경 속의 것들을 듣고, 보고, 만지려고 하는 태도로 그려나갔다”고 했다. 풍경 속의 것들, 그것을 그리겠다고 그는 구름 낀 날 을지로 골목길을 걷다가 어떤 창문 앞에, 어떤 계단 앞에, 어떤 지붕 앞에, 어떤 시간 앞에, 어떤 공간의 대기 앞에 서서 그의 몸에 와 닿아지는 것들을 하릴없이 들여다 보았나 싶다.


정작 정재호는 이 풍경 그림에 대해 무척 건조해 보일 거라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풍경을 그림에 맞춰 생략하거나 과장하여 그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림 더러 풍경에 맞추라는 듯 설득하고 달래며 그대로를 정확하게 그리려 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아무도 모를 그의 속내 때문일 거다. 그리기라는 몸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그의 태도는 풍경에 대한 사실적인 감각에 따른다. 흔히들 그와 그의 그림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는 현재의 시간과 현실의 풍경을 그대로 기록하고자 하는 이로, 굳이 나누자면 일련의 현장 보고서와 견줄만한 다큐멘터리 회화 혹은 아카이브 회화의 범주에 대해 가늠케 한다. 이때, 그는 “듣고”, “보고”, “만지는” 감각으로의 사실성을 쫓는다. 이를테면, 그는 과거의 근대적 도시 풍경으로부터 쉼 없이 이어져 온 현재의 표류하는 풍경을 추려 기록을 자처한다. 그게 가능한가. 표류하는 것을 기록한다는 것. 서울 야경을 그렸던 초기 회화부터 첫 개인전 ⟪인천여행⟫(2003)에서 보여준 그의 사실적 풍경 회화는, 이후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를 찾아나서 그것의 기념비적 풍경을 기록하는 일을 경유하다가, 과거의 유토피아적 잔해로 남겨진 근대 건축물의 외벽 풍경을 조망하면서 어느새 을지로에 이르렀다.


그 풍경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내막이야 숱한 은폐와 기억상실의 모순을 겪으면서도 우리의 무의식적인 기억 속 향수처럼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진보의 속도 뒤에서 현실의 낭만적 서사를 엮어냈던 유령들의 표류를 뒷받침하며 끈덕지게 구전되어 오지 않았던가. 정재호는 거대한 담론의 역사적 서사와 사회적 장소로서의 현실 풍경과 마주하되, 그 “풍경 안에 (남아) 있는 것들”로서 듣고 보고 만져지는 유령들의 육체적 현전을 알아채려 했던 모양이다. 적당한 유머처럼 듣고 그냥 말 수도 있겠지만, <유령의 말>(2020)은 어떤 징후처럼 보인다. 그건 그가 을지로3가 구식 건물 계단을 오르다 뜬금없이 낙서처럼 벽에 누군가 붙여놓은 유령 모양의 스티커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 순진한 표정으로 사진 몇 장을 찍었겠구나 싶은 그러한 장면이다. 폭이 좁고 높이도 낮은 도기다시(togidashi) 계단이며 짙은 녹색으로 도색한 강철 난간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시간들 사이로 우리를 표류하게 할 터이지만, 동시에 계단의 얼룩덜룩한 발자국과 난간의 반질반질한 손자국과 온갖 인간 체취의 냄새들과 공기의 흔적들이 물질처럼 뒤엉켜 있는 이 오래된 시간의 현전 앞에서, 저 새하얗고 귀여운 유령 스티커와 내 몸이 서로 대면하여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난쟁이의 집>(2020), <두 개의 초록 선>(2020), <밤, 꽃>(2020), <쏟은 말>(2020), <천국의 문>(2020)처럼, 풍경 속의 것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비장한 존재감을 내세운다. 그것들의 비장함은 언제부터 이 거대한 풍경 속에 들어왔는지 모르는데 여태 그 풍경에 끈적하게 붙어 표류하듯 존재하고 있다는 그 역설에서 온 것일 테다. 깨진 유리창을 틀어막은 저 더미들은 수년 째 그의 눈길을 끈 장면으로, 저것이 사라진다면 아마 죽음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느 순간 스스로 하나의 육체가 되었으리라. 정재호는 진보와 발전으로 유토피아를 꿈꾸며 설계해 온 한국 근현대사의 출발점에서 (그것의 원대한 미래로서의) 현재의 시간을 상상하던 곳에 계속 서서, 거대한 풍경의 서사에 저항하듯 그것을 등진 채 뾰족하고 누추한 육체들을 키워낸 풍경 속의 (아무) 것들을 방문한다. 그런 의미에서, “창”과 “더미”는 풍경 속에서 발견한 무언가의 형상이다.


2. 포도나무의 시간

⟪창과 더미⟫(2020-21)는 오래된 을지로 풍경에 그가 붙여 놓은 이름이다. 그 전시 제목과 같은 <창과 더미>(2020)에 대해서, 정재호는 “협곡처럼 들러붙은 건물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각목이 있고 그 뒤로는 버릴 것을 모아 놓은 더미가 놓여 있었다”며 거기서 “사선으로 일어선 창”과 “전장의 주검들”을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풍경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창과 더미가 되게 하기 위해서 협곡처럼 거대한 풍경을 그가 마주 서서 본 그대로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을 텐데,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손으로 만지듯 그린 옛 산수화처럼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눈과 그의 육체 앞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그림에 담고자 붓을 들고 하염없이 그리기를 자처했다. 오래된 시간 속으로 무언가 사라지는 사태를 계속 겪고 있는 현실에서, 풍경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진실하게 그리는 행위는 불가피해 보인다. 어쩌면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거대한 변화가 탄생시킨 아파트 외벽의 “기원”에 그가 한참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알 수 없는 거대한 풍경의 구석구석을 가로지르듯 불쑥 튀어나온 얼룩이며, 구멍, 먼지, 잔해들을 그려 놓기 위한 불가피한 현실 풍경의 역설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불가피한 현실 풍경의 역설, 그것을 나는 어느 시에서 가져온 “포도나무의 시간”과 같은 거라고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포도나무를 태우며>라는 시에서, 시인은 어느 해 숨을 멈춘 포도나무에 대해 말한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삶의 비유이며, 그러한 삶과 죽음 “사이”의 긴 시간, 그러니까 종국에는 삶과 죽음을 모두 포괄하는 오랜 시간에 대한 육체적 감각을 포도나무의 시간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그래서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 즉 “기원”에 대한 기억과 상상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라는 시인의 물음은, 불타고 있는 포도나무의 현전에 시선을 집중시켜 그것의 오래된 시간, 다시 말하자면, 기원과 관련된 기억을 애도하는 현재의 시간이 지닌 장엄함을 일깨운다. “풍경/오래된 시간”이자 “풍경 속에 (남아) 있는 것/현재의 시간” 속에서 동시에 죽음을 향해 타들어 가면서 현전하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정재호의 <창과 더미>가 환기시키는 불가피한 현실 풍경의 역설과 닮았다.


 “사선으로 일어선 창”과 “전장의 주검들”은, 현재의 시간과 현실의 풍경 속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묻는 물음에 대한 우회적인 답이 될 것이다. 창과 더미는,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까”라고 물었던 시인의 질문에 대한 이미지의 화답처럼, 존재와 부재의 동시성을 말할 뿐 아니라, 그 사이의 오래된 긴 시간성과 그것의 변증법적 시대착오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참된 이미지”로서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방주>(2020)는, 표류를 자처하는 이 커다란 풍경은, 계수하듯 제 형상을 끝없이 보게 한다. 우리는 이 풍경 그림 앞에서, 나와 대면한 “보기/응시”의 사태 안에서, 눈 앞의 것을 보면서 (동시에) 저 먼 곳의 무언가를 알아채야 한다. 그리고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추상적인 화법 대로, “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 없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보기라는 육체의 행위를 통해서.


3.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

정재호는 그가 대면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그리고 싶다는 마음에, 그에게는 다소 생경한 유화 물감을 사용했다. 그는 동양화가로 주로 종이에 먹과 동양화 물감이나 아크릴 물감 등을 사용해 왔다. 일련의 도시 풍경을 비롯해 주변의 크고 작은 사물과 풍경에 주목해 왔던 정재호는, 큰 공백과도 같은 그것의 거대한 광경을 말 그대로 명확히/명백히 그려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그림 앞에 바짝 세워 풍경 안에서 그가 본 것들을 (다시) “발견”하도록 했다. 그건 어쩌면 풍경과 대면했던 육체의 감각 혹은 사실적 감각을 기억하고 발견하여, “그리게” 하는 행위 자체를 추동하는 일일 지도 모른다. “유화 물감은 부분의 집적을 통해 전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그리게” 했다며, 정재호가 체감한 유화의 물성은 풍경 속에 있는 것들을 발견하여 손으로 만지듯 화면에 꺼내어 놓기에 적절했다. 이때, 그는 풍경 속에 있는 형태의 모든 기원을 발견하는 “보기”의 주체이면서 그 대상들과 대면한, 즉 풍경 속 대상들이 대면하고 있는 화가의 육체에 대한 인식까지 환기시킨다. 말하자면, “봄”으로 인해 발견된 끊임없는 육체적 현전의 왕복 운동 같은 것이다.


 <방주>에 대해서, 나는 “저 많은 것들 중에서 붓 자국조차 선명하지 않은 흰 실오라기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실패를 의심하면서. 묶어 놓은 무언가가 사라지면서 혼자 거기에 남아 있게 된 것인지, 어디서 날아와 그때부터 난간에 걸쳐진 것인지, 저 알 수 없는 풍경에 언제부터인가 저 형태로 남게 된 흰색의 끈을 만지듯 그려낸 화가의 손놀림과 그의 눈동자와 그의 호흡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의 고유한 색과 질감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싶었기 때문”에 유화 물감을 사용하게 된 정황처럼, 풍경 고유의 색과 질감뿐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그려내려 한 그의 행위가 변증법적 합(혹은 부정)을 해소되지 않는 긴장 속에 작동시킨다고 할까. 이 대목에서, 나는 그의 동양화가로서의 체화된 감각과 태도를 떠올려 본다. 손으로 풍경 속 만물을 만지듯 그리려는 태도는, 선묘적 그리기로서 거대한 산수 풍경에 이입하여 그 안에 뛰어든 화가의 육체를 떠올리게 한다. 준법 등 선묘적 기법을 수행하면서 거시적인 풍경의 디테일을 세운 붓과 세운 팔꿈치로 하나하나 매만졌던, 동양화가들의 그 그리기 행위와 일치하는 붓놀림에 대해서 말이다. 정재호는 <방주>를 그리면서 눈 앞에 있는 주저 앉은 지붕의 형태 뿐 아니라 그것의 질감을 (칠했기 보다는) “그렸으며”, 그 가장자리에 돌출한 녹슨 못들과 삭은 각목 더미들이 형태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난간을 지나 저 안 벽의 모서리에 나 있는 먼지 덮인 창문과 그것을 가리고 있는 낡은 천막에 붓이 가서 닿기까지, 찍어 놓은 사진을 수십 번 눈 앞에까지 당겨 확대하면서 자신의 몸을 원근법적 풍경 속에 일일이 가져다 놓은 여정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 어떤 착시와 생략과 강조도 포기한 채, 그는 모든 것 안에 들어가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옥상의 바다>(2020)도 주저 앉은 지붕처럼 그의 시선 아래 있다. 모든 원근법적 관계를 좌절시키는 을지로의 풍경 한가운데 서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실제의 “거리”에 대해 생각했다. <소리를 듣는 곳>(2020)에서는, 그의 위치에서 다 보이지 않는 흰색 건물의 옥상과 풍경 중간쯤 놓인 건물의 관계에서 그는 “듣기”의 감각을 상상해냈다. 얼마큼 떨어져 있는지 모를 저 실재하는 장소 사이의 거리를, 그는 그림에 나타나 있지 않은 소리의 현전을 상상함으로써 밀고 당기며 가늠케 하는 것이다. <옥상의 바다>에서는 시각적인 것의 불확실함이 냄새와 촉감으로 다시 헤아려진다. 옥상의 방수 도료는 거의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 옥상의 녹색을 본다. 습하고 끈적거리는 물이끼와 곰팡이가 방수 도료의 녹색을 잠식하여 다른 녹색을 채우고 있는데, 우리의 눈은 단지 옥상의 녹색, 그것을 본다. 이 불완전한 보기에 저항하면서도, 정재호는 유연한 동양화 붓에 유화 물감을 묻혀 그가 보고, 냄새 맡고, 몸에 각인된 촉감을 다시 기억하며 그가 본 그대로의 풍경 그리기에 하염없이 몰입했다.


오래된 시간, 포도나무의 시간, 그것이 환기시키는 삶과 죽음 사이의 긴 시간, 그 시간과 함께 대면하는 일련의 감각을 알기에, 정재호는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의 풍경을 단지 그리면서 그 그리기의 행위가 기억해내는 것에 대해 그렇게나 마음을 두는 것 같다. 그래서 또, 나는, 어떠한 탄생과 죽음, 이데올로기와 시대정신으로부터 무심하게 잊혀져 버린 혹은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서 “아무것”으로 초라하게 놓인, 그러한 것들을 발견하여 알아보고 아무렇지 않게 대상과 관계 맺으며 그림 그리는 화가의 몸을, 저 시대착오의 예민한 이데올로기적 풍경들 속에서, 바라본다.


글. 안소연(미술비평가)



1  허수경의 시 <포도나무를 태우며> 첫째 연과 마지막 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