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  JAEHO JUNG

창과 더미

Spear and Heap

2 - 27 Dec. 2020

6 - 17 Jan. 2021

Eulji-ro


이번에 그린 그림들은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의 풍경들이다. 이곳은 익숙한 곳이었고 전에도 몇 점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지만 마음먹고 여기를 그리게 된 것은 처음이다. 세운상가를 가운데에 두고 종로에서 청계천을 거쳐 을지로에 이르는 풍경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재개발로 ‘세운 몇 구역’이라는 이름으로 구획되어 본래 이름을 잃어버린 채 급하게 헐려 나가고 있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히 밀집해 있던 집들은 지붕이 걷어내 지는가 싶더니 벽이 뜯기고 이내 작은 언덕들이 되었다. 세운3구역이 완전히 치워지고 공터가 된 것은 얼마 전 가을의 일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달려와서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는 작업반장님은 내 핸드폰 속의 그림들을 보고 이내 누그러져 그동안 있었던 이곳의 일들을 들려주었다. 모르고 있던 것들,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실들을 들었고 작업실에 돌아와 다시 그림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리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창과 더미〉는 이즈음에 그린 그림이다. 을지로의 뒤편을 찍은 사진을 당기고 잘라낸 장면 속에는 협곡처럼 들러붙은 건물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각목이 있고 그 뒤로는 버릴 것을 모아놓은 더미가 놓여있다. 나는 사선으로 일어선 창을 생각했고 전장의 주검들을 생각했다. 아마 이 그림은 각목과 더미를 창과 주검으로 그림으로써 폐허, 죽음, 저항을 상징하는 그림이 될 터였다. 하지만 조금 더 세심하게 묘사한 것 외에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안다고 생각하고 풍경을 그리는 것은 얼마나 섣부른 일인가. 오히려 주저앉아 듣고, 보고 그리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래서 남은 그림을 그리는 일은 풍경 속의 세부들을 묘사하여 집을 세우고 거리를 만들고 원근과 빛을 조율하기 위해 작은 붓질을 거듭해서 쌓는 과정이 되었다.


 이번 그림들은 모두 유화로 그린 것이다. 유화라는 재료에 대한 매혹과 호기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곳의 고유한 색과 질감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료가 바뀌니 그림을 그리는 과정도 전과 달라졌다. 장지에 물감을 쌓는 과정이 전체에서 부분들을 드러나게 하는 과정이었다면, 유화물감은 부분의 집적을 통해 전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그리게 하였다. 물체들에 형태와 색, 질감을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풍경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흡사 건축의 과정과 닮아있어서 풍경과의 거리감을 해체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건축에 직접 참여하듯이 사물들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미술이라는 것, 회화라는 것을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고 풍경 속의 것들을 듣고, 보고, 만지려고 하는 태도로 그려나갔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리는 풍경화가 있고, 알기 위해서 그리는 풍경화가 있고, 앎이라는 욕망을 제쳐두고 그냥 그리는 풍경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첫 번째 경우로부터 시작했고 두 번째 경우를 거쳐 나중엔 세 번째 경우, 그러니까 그저 그리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풍경은 그리기 전과 그리는 도중, 그리고 난 후에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난한 세부를 거쳐 그림을 완성하고 난 후 실제의 풍경을 보면 그것은 더 장엄한 것이 된다. 이곳의 풍경뿐 아니라 아마 모든 풍경이 그럴 것이다.


그림들을 걸어놓고 보니 턱없이 부족하고 진부하다. 문득 그냥 벌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어쩌겠는가, 그냥 더 가 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