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신종찬 개인전
《열 두 가지의 물길》
2025. 11. 13. - 12. 10.
프리즘 PRISM
김민조 오주안 홍세진
2025.8.5.Tue – 8.20.Wed
실재와 관념의 축을 통해 세계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회화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회화 작가의 위치는 어디쯤 있는가. 김민조, 오주안, 홍세진은 90년대 생으로 시대에 따른 매체 변화를 겪어왔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로 다시 디지털 시대에서 AI 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술의 변화를 체험하고 지각한 세대인 것이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세계를 뒤로하고 가상으로 뻗어 나가는 시대의 중심에서 세 작가는 ‘회화’를 그린다. ‘그린다’라는 근원적인 행위를 통해 세계를 감각한다. 현시대의 인류는 물질적인 세계를 벗어나 ‘화면’ 속에 자리한 대상과 존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구분한 이원론은 정신을 가상에 이전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성별, 국적, 언어의 제약을 넘어 자유를 지향하고자 한다. 동시대의 작가 또한 이에 반응하여 게임, 영화, 메타버스 등 가상에 뿌리를 둔 제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물질적인 형상으로 세계에 군림하던 권위 체계에 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새로이 개인을 종속시키는 흐름임을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회화는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번 전시는 근원적으로 회화가 가상을 소재 삼기 이전부터 현실과 관념의 교섭 속에서 이루어짐을 지시하는 작가들의 시선이다.
오주안의 붓질은 통념적인 관점을 벗어나 대상을 확대하고 각도를 달리하는 미시적 시도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유기체의 미시세계를 눈으로 직접 관측할 수 없기에 현미경이라는 기계적 안구를 통해 관측해야만’ 한다는 작가노트의 말처럼 오주안은 이면의 것을 응시하려 한다. 관찰하는 세계는 불규칙한 유기체로 이루어진 것이며 가까이 보기, 비틀어 보기는 고정된 대상이 아닌 유동적 대상을 포착한다. 일찍이 시클롭스키가 기술하였듯 ‘낯설게 하기’는 “삶의 감각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물들을 느끼기 위해, 돌을 돌로 만들기 위해 이른바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는 앞선 문장에 뒤따라오는 지각을 지연시키고 어렵게 하기와 맞닿은 것이며 이는 난해가 아닌 이면에 맞닿으려는 예술의 요소를 맥락으로 삼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대상을 원근법과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선과 면 그리고 색채를 위계 없이 펼친다. 가까이서 본 대상은 관습화된 형상이 아닌 얼핏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그러나 자세히 볼수록 선명해지는 형상의 이면을 품고 있다. 현미경의 시 점이 수직적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지듯 , 에서 드러나는 시선 또한 정수리를 포착한다. 이때 수직성은 계급화된 것이 아니며, 정면으로 대표되는 인상을 벗어난 전복의 움직임이다. 보이지 않던 것을 확대하거나 다르게 위치시키며 변주하는 작가의 작품은 색안경으로 보이지 않던 낯섦을 세밀히 비추는 렌즈와 같다.
홍세진은 공업적인 사물이나 낙후하여 낙오된 대상을 주제 삼는다. 어딘가 쇠락한 장소와 장면은 더는 작동하지 않는 것은 홍세진에 의해 새로이 작동한다. 기능을 위해 부품화된 요소는 유용함에서 떨어져 독립적이고 자생적인 존재로 화면에 자립한다. 이러한 탈바꿈은 작가의 회화가 지닌 생명력의 근원이 며 공장과 폐부품에 자연물이 어우러지게 만드는 새로운 환경이다. 역설적인 재생력은 기능하지 않음으로 대상이 지닌 형상을 무용하지만 고유한 것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쓰임이 없는 것이 화면의 규칙 속에서 리싸이클링 되는 과정은 가상을 복제하고 재생산하는 것과 달리 회화가 근원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인식의 재정의를 상기시킨다. 그의 회화는 버려진 것이 소멸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전경으로 펼쳐질 수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김민조는 세계를 형성하는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와 주변을 인지하며 눈에 띄지 않지만 연결된 것을 바라본다. 그의 회화에서 대상은 뒤엉키고 간섭된 상태로 발견된다. 이는 존재가 실존하므로 겪게 되는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의 고리와 같으며 외곽 혹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대상이 서로 관계하는 형상이다. 대상과 시공간이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중심부를 꾸리지 않고 각기 화면의 요소로 작용하는 구상의 방식은 쏟아지거나 끊어짐 없이 균형을 맞춘다. 쏟아지고 끊어질 것 같은 대상은 작가의 회화를 통해 심상이라는 이스트로 부풀어 오르며 외곽의 빼곡함을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복합적으로 얽힌 물질적 형상은 세계가 다중적인 분열과 접합의 시공간임을 무수한 통신 포화와 교섭의 자리임을 되새기게 한다. 현실에서 전선을 보는 것만으로 무형의 정보를 듣거나 그와 대화할 수 없다면, 그의 화면에서는 연결된 수많은 요소가 무수히 속삭이고 있다. 수신자 없이 발신의 연속체인 세계에서 비스듬히 존재한다. 서로에게 기댄 요소들의 속삭임은 한자리에 모여 웅성거린다.
프리즘은 다면체 광학 부품으로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눈으로 관측하면 그것은 무지개이며 동시에 한 줄기 백색 광선이다. 빛이 지닌 파장의 차이로 색은 여러 빛을 낸다. 회화는 분광(分光)처럼 각기 지닌 파장의 연속이며 작가의 눈을 통해 캔버스라는 상에 도달하는 세계는 제각각 다른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는 곁에 존재하나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그리는’ 세 작가를 조명하는 자리다. 무형의 시대에서 이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형상에 깃든 존재이며 그것은 가상이나 가상 아닌 대지에 거주하는 존재이다. 이들의 회화는 어둠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밝혀 그리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때만 관측되는 이면은 가상과 AI가 주류를 이룬 시대에서 본질적인 회화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글_김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