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한효진 solo exhibition
《Wonderful Days》
2025. 5. 1. - 5. 17.
한효진(1974~)은 서울예술대학교 사진과를 졸업하고, 현재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있다. 중장년층과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그들의 삶과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주 요 작품으로는 , <쉰,>, 가 있으며, 2024년 부산 국제 사진제에서 최우수 포트 폴리오로 선정된 바 있다
<원더풀 데이즈>-작가노트
콜라텍은 ‘콜라(Cola)’와 ‘디스코텍(Discotheque)’의 합성어로, 한국 사회에서 독특한 춤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아왔 다. 1980년대 후반, 청소년들이 춤을 추던 장소에서 출발해 시 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년층의 공간으로 변화 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춤’은 오랫동안 통제의 대상이었다.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기, 대중 문화는 강한 검열 아래 놓였고, 춤은 ‘풍기 문란’이라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금지되었다. 1990년대 이후 사교댄스와 댄스스포츠가 등장했지만, 노인 들의 춤은 여전히 터부시되며 주변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콜라텍에서 춤을 추는 노인들은 과 거와 현재의 사회적 통제를 넘어 자신의 존재를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춤은 그들에게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자 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춤은 ‘점잖지 못한 행동’ 혹은 ‘도덕적 해이’로 오해받곤 한다. 콜라텍은 단순한 유흥 공간이 아니다. 이곳에서 노인들은 몸을 움직이며 자신을 표현하고,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는다. 특히 춤을 추며 나누는 손길은 단순한 접촉을 넘어서는 상징적 인 행위다. 고립과 소외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서로의 온 기를 느끼고 삶의 리듬을 다시 실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되기 쉬운 노인들 에게 콜라텍은 리듬을 통해 연결되고 감각을 회복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흔히 노인의 삶은 종종 과거형으로 이야기되지만, 콜라텍에서의 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 속되고 있다. 리듬을 따라 몸을 움직이며, 그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낀다. 이 시간은 이들에게 ‘원더풀 데이즈’이며,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중요한 일상의 풍경이 기도 하다. 이 작업은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노인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요즘 콜라텍이라는 공간을 통해 노인문화를 다시 바라보 려는 시도다. 단순한 여가 활동을 넘어, 이들이 추는 춤은 지 금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서로를 이어주는 몸짓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백지장의 사각형 속에서 살고 죽고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둡고 밝은 면이 있고 제각기 높이가 다르며 계단처럼 올라가거나 내려오고 움푹 패고 불룩 튀어나온 구역과, 단단하거나 또는 무르고 스며들기 쉬우며 구멍이 숭숭 난 지대가 있는, 사각으로 경계가 지어지고 이리저리 잘려졌으며
-얼룩덜룩한 공간 안에서 살고, 죽고, 사랑한다.
영혼과 육체, 그 서글픈 어긋남에 관하여
다큐멘터리 사진가 니콜라스 닉슨(Nicholas Nixon, 1947- )이 아내와 그녀의 자매들을 처음 찍은 것은 1974년이다. 닉슨은 현재까지 오십 여 년 간 매해 한 번씩 그녀들을 동일한 포맷으로 촬영해오고 있다. 첫 사진 속 이십 대의 그녀들은 이제 칠십 대가 되었다. 촬영 때 마다 늘 같은 자리에 위치한 그녀들의 모습은 오십 여 점의 사진 속에서 서서히 나이 들어간 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동일인의 외양적 변화를 점층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닉슨은 사진이 순 간의 ‘포착’일 뿐 아니라 시간의 ‘추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효진의 사진은 닉슨의 <브라운 자매들(Brown sisters)>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을 전공 하고 잡지와 스튜디오에서 사진 일을 하던 1974년생 작가가 오랜 시간 휴지기를 가지다가 카 메라를 다시 잡게 된 것은 나이 오십이 다 돼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에 익숙해져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다가올 노후를 걱정할 나이에 그녀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고 싶 던 일을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된 셈이다. 본인과 같은 나이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나이를 맞을까 주위를 둘러보며 쉰이 된 쉰 명의 사람들을 찍은 것이 연작 <쉰 (fifty on fifty)>(2023)이다. 언제 올지 모를 죽음을 떠올리며 준비된 영정 사진을 찍듯 각자 가 원하는 장소에서 자신이 좋아하거나 남기고 싶은 것들과 함께 인생의 반환점을 돈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현재 최선의 상태로 담아내고자 했다.
한편 <쉰>보다 앞서 시작한 것이 <자매(sisters)>(2022) 연작이다. 오빠만 둘인 작가는 어 릴 때부터 언니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소꿉놀이도 같이 하고 옷이나 신발도 나눠 신으 며 부모님이나 오빠들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자매> 연작은 그러 한 작가의 개인적인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나이와 무관하게 자매 관계의 여성들을 찍었지만 작가가 동경하던 ‘언니’가 기준이 되었기에 다수의 인물들이 작가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 이상 의 여성들이 되었다. 그 나이에 자매는 대부분 함께 살지 않는다. 각자의 가족을 꾸렸거나 함 께 지낸 시간만큼 긴 시간을 따로 살아왔기에, 유전적으로 닮았지만 환경적으로 달라진 중년 의 자매에게는 분리된 연결성이 느껴진다. 그러한 미묘한 차이가 자매의 사진 속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게 만든다.
닉슨이 시간의 추이를 따라 특정인의 변화를 따라갔다면, 이렇듯 한효진은 시간의 축을 가로질러 동시대 사람들을 바라본다. 전작들이 나이 들어감에 대한 고찰이었다면, 신작 <콜라 텍>은 그보다 나이가 더 든 이들의 삶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노인들의 여가에 대한 호 기심’에서 시작되었다고 쓰지 않는 이유는 ‘노인’과 ‘호기심’이라는 단어의 부적절함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노인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회적 연령의 구분일 뿐, 우 리 모두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시간이 지나면 노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어있을 따름이다. 한편 모르는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을 뜻하는 호기심이라기에 작가는 이미 나이 들어감과 죽음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해온 것 같다. 그런 작가가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콜라텍은 나이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나이를 인식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관심을 갖기 에 충분한 곳이었을 것이다.
콜라텍은 1990년대 말 청소년의 여가문화를 위해 생겨난 춤 공간이다. 초기에는 국가가 보급을 장려하면서 크게 번성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소년 일탈의 온상으로 여겨지면서 빠르게 쇠퇴했고, 2000년대 들어 성인 콜라텍으로 전환되어 오늘날 노인 전용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의 취지와 달리 정부 차원의 관리나 규제가 부재한 탓에 불법 단속 의 대상이 되거나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받는 음지의 공간이 되었다. 그곳의 춤 역시 블루스, 트로트, 지루박 등 서양의 사교댄스가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으로, 댄스스포츠가 올림픽 종목 으로 채택된 이후에도 공인된 것과 배제된 것의 차이로 인해 여전히 차별적 시선을 받고 있 다. 이처럼 여러 지점에서 콜라텍은 한국 특유의 모순적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라텍은 경제력이 없는 – 청소년과 노인이라는 - 사회적 약자에게 허락된 여가공간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다른 유흥업소들과 달리 천원 남짓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반나절 이상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춤을 추는 공간 외에도 저렴한 가격에 음료 와 술, 식사와 안주를 함께 할 수 있기에 그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해결되는 곳이다. 그들이 콜라텍에 가는 이유는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사회적 관계와 그로부터 느끼는 고독 감과 무료함을 해소하기 위함이 클 것이다. 경로당이나 복지관 같은 시설과 달리 콜라텍은 사 람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 된다. 그들 은 퇴폐와 탈선의 시선을 스스로 내재화하여 주위를 의식하면서도 그 장소에 들어서면 음악에 젖어들고 춤에 몰입한다. 스텝을 밟거나 턴을 하고 파트너와 호흡이 맞아 원하는 동작이 들어 맞을 때 느끼는 희열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고 흥겨운 음악과 함께 몸을 움직이는 그 시간만큼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이 오직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한효진의 <콜라텍> 연작은 한국적 모순의 공간으로서 콜라텍과 인생의 소중한 일상의 시 간을 보내는 그곳의 사람들을 모두 담고 있다. 처음에 콜라텍 입구와 텅 빈 무대, 물품보관함 같은 사람이 없는 공간들을 먼저 찍기 시작한 작가는 점차 춤을 추는 그들의 ‘플로워’로 다가 가 움직이는 손과 발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들과 관계를 형성해가고 설득에 공을 들여 사람들의 전신을 카메라에 담았다. 작가는 인공조명과 반짝이는 배경막을 써서 그들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빛나게 만들고자 했고, 초상사진이 아닌 경우에는 어두운 장소의 제한된 조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춤이 삶의 일부이며 콜라텍은 일상의 공간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진 속 인물들의 꼿꼿한 허리와 당당한 자세가 그들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조악 한 인테리어의 입구와 그들이 앉아 있는 낡은 소파는 이곳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준다.
오늘날 초상사진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주기 위해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향하는 사진가의 수평적 시선일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을 대상화하여 바 라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듯 동질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작가의 시선 말이다. 한효진의 사진 에는 그러한 시선이 일관되게 자리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진 속 인물들은 대체로 사회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직면하게 될 시간이라는 점에서 사진을 보는 우리들과 무관하지 않다. 적지 않은 나이에 사진을 다시 시작한 작가는 어느 때보다 에너지가 넘쳐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런 그녀가 새롭게 촬영을 시작한 신작은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은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애도의 방식을 다룬 사진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문득 그러한 사실 이 실감되는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본인도 모르는 최상의 육체적 상태가 존재하듯, 육체의 노화 역시 서서히 이루어지기에 체감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 예전 같 지 않은 자신의 노쇠한 육신과 사회가 규정하는 노인에 해당하는 나이가 일치함을 실감하는 순간 비로소 현실을 인정할 따름이다. 인간의 육체는 노화를 거스를 수 없지만 마음과 생각은 늙지 않는다. 좀 더 단단하게 굳어질 뿐. 작가는 그러한 육체와 영혼의 서글픈 어긋남을 눈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전시의 영상 속 여성이 입은 플레어스커트의 분홍 땡땡이가 그녀가 턴을 돌 때마다 점점이 반짝이는 미러볼 불빛처럼 사방으로 흩날린다. 작가는 지금이 그들에게 혹 은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글ㆍ신혜영(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