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최인엽 Solo Exhibition
< 쌓여진 것들은 흘러가고 >
22. November 2023 - 7. December 2023
시간에 부드럽게 맞선다면 - 차분한 격동 속에서
가만히 있었다—파악할 수 없는 시간의 부피가,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우리 모두가, 처음에는.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히 ‘처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이 오게 되자 부피는 시간으로 조각난다. 조각 난 부피에는 시간이 흐르게 된다. 한곳에 시간의 흐름을 알아본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에 가능하다. 적극적인 파악과 수동적인 파악이, 부피에서 흘러내린다. 그곳을 일부러 만지고 조작하고 변 이시키는 존재가 있고, 이를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다. 두 눈에 비치는 흐름에 보이는 것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사라진 곳에 무언가가 새로 들어서게 될 때, 우리는 이전 기억을 따라/따라가 지금 이 자리에 과거를 불러낸 결과.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시간의 변화는 떠나지 않고 여전히 있는 사람에 의해 감지되고 파악된다. 계절이 바뀌자, 시간이 지나자 주변 풍경은 바뀐다. 이때,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에 의해서, 그가 갖게 된 감각에 의해서 시간은 비로소 흘러가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곳, 사람이 사 는 곳에 시간이 흐른다. 그 모양새는 흘러가기도, 흘러내리기도, 그리고 녹아내리기도 한다—사람과 사 람, 사람들과 공간 사이에서.
우리가 사는 곳에 시간이 흘러간다면, 사람과 같이 흘러간다—그 흐름을 같이 따라오거나, 혹은 반대로 남겨지면서. 여기에 남은, 남아 있게 된 감각은 흘러내리는 것을 붙잡으려는 태도와도 같다. 그것이— 시간이, 장소가, 그곳에 있는/있던 사람이, 이 모두의 감각이—사라지기 전에 붙잡고자 하는 태도로써 말이다. 사실 흘러가는 것과 흘러내리는 것은 의미가 약간 다르다. 전자는 어떤 대상이 A에서 B로 이동 하는, 변화에 명확한 단계가 있는 것이고, 후자는 A였다가 서서히 A가 아닌—아닌 이상, B라 부를 수도 있는 대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차이가 나지만, 최인엽의 작업에서 둘은 모두 응고한다. 이번 개인전 《쌓 이는 것들은 흘러가고》에서 작가는 눈으로 보고 느낀 시간과 장소를 그림으로 담는다. 그곳—그림에 는 작가가 이 지역에 머물고 작업하면서 풍경을 보고 와 닿은 감각에서 출발하였다. 작업실을 다니면서 을지로 일대 풍경이 바뀌는 것을 익숙하게 보아 온 작가의 시선은 파도가 일고 덮치듯 화면 안에 담긴 조형적 요소로서 담긴다. 그곳—작가가 본 장소에 흘러가는 시간을 그림이라는 또 다른 곳으로 옮길 때 는 흘러내리는 것, 즉 여전히 여기에 있는 (것들의) 시선으로 담는다. 그것은 변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맞서(는) 형태로 기록된다.
흘러감과 흘러내림을 담는 몸짓은 이전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모래 보따리를 끌거나(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작업 <Trockene Oase(메마른 오아시스)> 2015), 전시장 코너에 온몸으로 드로잉을 시도 한(마찬가지로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작업 <#2 Ich : Zeichnung> 2016) 연장선상에서 작가는 흐름을 담으려고 한다. 전시장에 있는 작품을 보면 섬처럼 고독하거나, 그런가 하면 이곳을 향해 밀려오는 물 결과도 같이 솟아올랐다가, 화면 안에서 촛농처럼 형태가 녹아내린다—그러고 다시 굳는다. 어떤 힘을 외부에서 받고 녹아내려 굳은 형태는 다시, 그러나 또 다른 형태가 되어 여기에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 면, 흘러내리는 것과 녹아내리는 것은 의미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욱 수 동적인, 즉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다시 굳은 모습에 녹아내린, 있 던 것이 형태를 잃는 일에서 오는 안타까움은, 그렇다고 현실을 똑같이 비추는 것을 목표 삼지 않는다. 작품은 단지 도시의, 그곳의 건물이나 현장의 시각적인 재현도 비유도 아니다. 오히려 이를 보는 시선 과 시간이 만나 움직임이 생기거나 흐름을 부여하는 관계망을 담으면서(도) 그럼에도 남는 것을 존재하 게 한다.
콘노 유키
전시장에서 최인엽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흘러가지도, 흘러내리지도, 녹아내리지도 않는다. 여전히 있 는 사람과 이들 주변에서 변화한 공간, 그들을 둘러싸서 함께 또는 각각 그려지는 시간은 흘러가고 흘 러내리고 녹아내리는 차분한 격동 속에 놓여 있다. 최인엽의 회화와 석고 오브제는 그 흐름과 움직임을 담고 또 잡아두는 울타리이다. 차분한 격동—그렇다. 그것은 태풍 속에 있거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상 실로 향하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다. 그저 그런대로, 언제 모르는 사이에 떠날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은 위 에서 아래로 내려가고, 아래에서 봤을 때 모든 것은 밑으로 퍼지고 스며든다—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 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과거는 떠나가는 것이라기보다 남는 것들이 현재로 밀 려오는 감각과도 같다—시간에 의해서, 사람에 의해서. 위에서 아래로 혹은 과거에서 현재로 자연스럽 게 향해 가듯, 또는 모습을 바꿀 수밖에 없을 정도의 위력으로 압박당하는 것과 달리, 차분한 격동은 그 럼에도 남는 것—풍경, 사람, 기억을 소중히 받아준다. 최인엽의 작품에 나타난 형상은 부정적인 용해 가 아니다. 흐름과 움직임이 응고한 모습에, 우리는 오히려 감싸는 온기를 들여다본다. 위에서 아래로, 과거에서 현재로 거역할 수 없을 때, 차분한 격동은 우리가/를 향해 무너지지 않도록 이곳에서 잘 받아 준다.
글. 콘노 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