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GSAN
김유경 Solo Exhibition
<Tropical Maladys : 夏至>
25. October - 12. November 2023
김유경의 그림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 꼭대기도 진창도 아닌 공간을 묘사한다. 작가는 자연 표면의 한시적 형상을 묘사하는 통속적 풍경화와는 다르게 우연히 조우한 풍경 이면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그림에 함축하여 은유적 공간으로 담아낸다. 또한 작가는 어떤 시간에서 어떤 시간으로 변용하는 과도기적 장소에서 느꼈던 순간적 감각들을 화폭 위에 재배열하고 흩뿌림으로 멈추어 있지만 그 안에서 흐르고 있는 독특한 시간성을 만들어 내왔다.
이번 전시 <Tropical Maladys>에서는 작가와 아주 가까웠던 외가 할아버지의 일제 강제동원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식민주의와 생태의 다면적인 연결 고리를 탐구하는 과정 중에 마주한 풍경과 장면들을 재구성하여 선보인다. 한 세기를 살아온 할아버지가 19살에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잃어버렸던 2년의 시간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디테일하다. 견딜 수 없이 뜨거웠던 강제 노역의 풍경 저 한 켠은 작가로 하여금 마치 베르길리우스1의 아르카디아2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언어로 생성된 김유경의 관념 속 심상은 식민의 역사가 서려 있는 여수 돌산의 풍경을 변모시켰다. 이 전시를 기점으로 지금까지는 작가가 실재하는 공간 이면의 에너지를 은유적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그 공간에 독특한 시간성을 부여했다면 이번에는 작가의 관념 속 가상공간의 심상과 기억 속 과거의 집단적 에너지를 식민의 역사 이후 멈춰버린 물리적 은유의 장소에 담아내었다. 이것은 타인의 기억 속 장소, 타인의 언어로 재구성된 관념적 장소, 역사적 시각으로 기록된 아카이브 속 장소 그리고 식민의 역사가 서려 있는 여수 돌산이라는 물질적 장소를 한데 심상화한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절제된 작가의 조형 언어로 만들어낸 화면과 공간의 여백은 실제로 있는 장소와 대상은 감추고 과거의 집단적 에너지는 드러냄으로, 감상자의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체험적이고 능동적인 감상법을 제안한다.
글. 이경미
보테니컬. 박소희
향. 변승혁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 로마 시인, 기원전 2세기 경의 로마 역사가 플리비우스(Polybius)가 묘사한 자신의 고향 아르카디아는 사람들이 노래를 즐기며 매년 음악 경연을 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내새울 것이 없는 척박한 땅이었으나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실제의 아르카디아를 축복과 풍요의 낙원으로 처음 묘사한 사람이 바로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였다.
2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에 위치한 고원지대. 사방이 산으로 막혀 다른 지방과 격리되어 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 아르카디아 동맹, 아카이아 동맹 등에 차례로 가입했으나 지역 내의 만티네이아와 테게아와의 불화로 다툼이 그치지 않았던 실제 장소이지만, 서양미술사에서 이곳 아르카디아가 작품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며 대자연의 풍요로움이 가득한 속세를 벗어난 이상향으로 묘사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