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지민석 Solo Exhibition
< 백팔신중도 百八神衆道 >
13. August 2023 - 2. September 2023
백팔신중도
지민석의 개인전 ≪백팔신중도≫는 신들의 초상화와 그들에 관한 서사, 그리고 그로부터 뻗어 나온 음악과 영상으로 이루어진 전시이다. 미술과 동양철학을 깊이 탐구해온 지민석 작가는 “백팔신중도 百八神衆道"라는 종교를,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종교는 특이하게도 코카콜라, 에르메스, 유튜브, 미키마우스, 비자 등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글로벌 브랜드와 상품들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작가가 직접 입거나 먹어본 것, 또는 눈으로 소비한 것들 중 108개를 선택하여 다시 관찰하고, 상상하여 신의 형상을 입혔다. 종교 “백팔신중도"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인 ‘만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생각의 통로다. 2020년부터 이어진 ‘신중도 프로젝트’의 그림과 글, 음악과 퍼포먼스는 하나의 종교적 세계관으로 수렴되었으며, 여기에는 작가의 동시대적 (자기)성찰이 담겨 있다.
앞서 말했듯 작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것들을 신의 모습으로 그렸다. 초상화 연작 <백팔신중도>(2020~2023)는 작가가 직접 먹고, 마시고, 걸치고, 타고, 눈으로 소비한 것들에서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평판, 표준 등)를 떼어내 낯설게 관찰한 결과물이다. 거듭 바라보고 감각한 것들을 조합해 한 화면 안에 재구성했다. 이 초상화들은 동양의 종교화, 그중에서도 특히 부처나 보살의 모습을 족자에 담은 탱화(幀畵)를 닮아 있다. 108개라는 초상화의 수가 말해주듯 <백팔신중도>는 대상의 실재를 들여다보기 위한 작가의 자발적 수행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수행은 놀이처럼 유희적인 성격을 띤다. 2020년부터 지금까지 3번의 전시에 걸쳐 108점의 초상이 완성되는 사이1, 각 도상에 관한 서사 또한 깊어졌다.
<백팔신중도경>(2023)에는 108개의 신 각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경전은 도덕경이라는 동양 철학서를 해체하고, 108개의 관찰의 대상을 통로 삼아 재조합한 글이다.2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통적인 동양 철학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럭키참스 시리얼의(29)의 생김새를 훑어가며, 아마존(47)의 사업모델을 역설해 넘어뜨리며, 또 때로는 게토레이(2)의 목 넘김 감각을 되새기면서 동양의 철학 구절들과 연결 지었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한계 너머에서 온 말씀을 체화해서 현대 문명의 산물에 기대어 교리를 탄생시켰다. 이름과 개념은 허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도덕경의 문장들을 여러 번 곱씹으며 읽어보았을 작가이지만,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한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보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질을 찾아가는 동안 발견해낸 사회적 통념과 대상 사이의 간극, 그 틈새를 파고드는 방법론적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사회에서 얻은 인위적인 개념을 내려놓고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도는 전통 종교무용의 형식으로도 이어졌다. 전시장 2층에 자리한 <백팔신중도무>(2023)는 백화점 곳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종교 의식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작업이다. 우리가 상품을 구입하고 문화생활을 하는 이 일상의 공간에서 무용가가 행복을 향한 몸의 언어를 펼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행해지는 이 종교 의식은 언어와 움직임 사이의 미끄러짐3, 대상과 무대의 부조화4 등 복합적인 충돌이 전면에 드러내고 만다. 영상을 감도는 어색함과 낯섦은 실재와 관습적 사고 사이의 틈을 벌리는 열쇳말이 된다. 5
지민석은 초상화와 경전, 의식이 아우라(초월적 울림)를 이루는 ≪백팔신중도≫를 종교 ‘놀이’ 공간이라 부른다. 전시 기간 동안 상업화랑 을지로점은 108개의 신을 위한 ‘제단'이자 SF적 상상이 허용되는 관객의 ‘놀이 공간'이 된다. 지민석은 자신이 선행한 놀이의 결과물들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관객을 초대한다. 제례악처럼 차분히 흐르는 <백팔신중도악>(2023), 느리고 유연한 움직임의 <백팔신중도무>(2023)는 “백팔신중도"의 교리를 시각을 넘어 청각과 촉각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한다. 공간을 아우르는 선율,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름 없는 이의 몸짓, 나부끼는 108신의 초상화가 한데 어우러져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전통 종교의 문법이 촉발하는 현재와 동떨어진 감각은 지금이라는 시간성마저 흔든다. 날짜와 시간 또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을 초월해 생각할 수 있다. 작가의 동시대적인 성찰로 채워진 시공간은 오히려 보는 이에게 무시간성의 단서를 제공한다. 지민석은 일상에서 멀어진 시공간을 마련하여 초상화와 경전, 의식이라는 놀이법을 펼쳐두고 자유로운 관찰 놀이에 앞장선다. 한껏 분주한 서울의 중심부에서 펼쳐질 우리들(작가-관객)의 종교 놀이는 자발적이며 재미있고, 공정하며 감각적인 형식을 취한다.
≪백팔신중도≫에서 ‘도'는 ‘道(길 도)’를 쓴다. 이 전시는 작가가 제시하는 행복으로 향하는 여러 길 중 하나로서의 전시이다. 작가는 그가 깨우친 본질을 직접 발화하기보다는 낯선 표현과 소리들로 은유함으로써 그 길의 가능성만을 제시할 뿐이다.
“한번 숨을 내쉬니 현묘한 연기가 길게 뻗어 나간다. 연기는 이내 사라지지만, 한번 연기를 본 사람 속에서는 영원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도가 이러하다.
-말보로(79)-
지민석이 제시하는 놀이는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연기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상으로 되돌아간 관객이 만물을 자유로운 관찰의 대상으로 볼 수 있기를, 즐거운 놀이의 대상으로 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익숙한 이름(코카콜라, 스타벅스, 샤넬 등)에 기대어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최고은(독립기획자)
1. 2020년에 《DOPA + Project : The Cosmic Race》(Palacio de la Autonomía, 멕시코)에서 4개의 글로벌 브랜드(코카콜라, 스타벅스, 맥도날드, 캠밸수프)를 신격화한 작품 <우주적 신들>(2020)을 전시한 것을 시작으로, 2022년에 개최한 개인전 《신중도》(삼각산시민청, 한국)에서는 25점의 초상화를 선보였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완성된 <백팔신중도>를 펼친다.
2. 이 중 71신 필립스의 말씀은 “덥수룩한 것"으로 시작한다. 필자가 필립스라는 이름을 보고 떠올린 것이 믹서기인 반면, 작가는 생각은 자연스레 면도기에 가닿은 듯하다. 아니면 애초에 71신은 필립스라는 브랜드명이 아니라 그의 세면대 근처에 놓인 면도기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일상의 것'을 새롭게 보는 일에는 국가, 성별, 나이, 주거형태 등 생각보다 많은 조건이 영향을 미친다. 지민석 작가는 108개의 신을 선정하는 과정에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가까운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3. “Cinco, cuatro, tres, dos.”라는 스페인어로 시작해 동양 종교의 무용이 이어진다.
4. 소매가 긴 흰 장삼을 입고 가면을 쓴 이가 백화점을 무대로 종교 의식을 행한다.
5. 예를 들어, 전통적인 가면무는 과장과 풍자, 패러디의 내러티브를 가지지만 <백팔신중도무>의 움직임은 그것과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