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JI-RO


신정균 Solo Exhibition

<LAST OF US>

3. Mar 2023 - 19. Mar 2023


침식된 과거, 퇴적된 미래


얼마 전 북극에 위치한 종자보관소가 이상고온으로 침수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한편 알프스에서는 만년설이 녹으면서 그 안에 묻혀있던 잔해가 드러나는 중이라고 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과거의 유산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보존의 차원에서 보면 이는 또 다른 위협을 의미하기도 한다. 빙하 속에 오랫동안 얼어있던 것이 상온에서 햇빛을 보게 되면 급격하게 상태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상치 못한 현상은 무엇을 묻어놓고 발굴할 것인지, 만약 인류가 일궈놓은 문명이 모두 리셋 된다면 복구 지점을 어디로 선택해야 할지와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지난 2020년 세계기록보관소 방문을 추진하다가 국경 봉쇄로 무산된 적이 있는 만큼 이는 나에게 상징적인 장면이라 여겨졌고 변화의 조짐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재난과 전염병의 확산, 국가 간의 분쟁 등 여러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이 작업은 '불확실한 미래가 과연 현재와 호환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저장 방식을 알아 보았는데 박물관의 수장고나 표본실을 방문하고 데이터 관리자, 타임캡슐 설계자, 고서 대체본 연구자 등 전문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는 그중에서 기존의 형식을 참고한 보존의 기술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이와 연관된 절차를 수행하였다. 

첫 번째는 소장품의 장기 보관을 위해 사본을 복제했을 때 생겨나는 원본과의 경계를 규명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대체물의 가치에 관하여 질문한다. 두 번째는 박제나 표본의 제작과 보관 처리 방법을 관찰하고 사물의 궤적이 응축된 표면을 함께 제시한다. 세 번째는 타임캡슐 관련 행사를 참관하면서 발견한 절차와 그 형식에 주목하여 묻혀진 과거와 지연된 미래의 시간성을 살펴본다. 이렇게 여러 백업의 형태 중 엇갈리면서도 서로 겹쳐지는 지점 안에서 어쩌면 지금의 기록을 지켜낼 유효한 실마리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세계를 구현하는 곳, 우리를 남겨놓는 법

캐시(Cache)란 자주 사용하는 자료를 복사해 놓는 임시 장소 , 혹은 은닉처를 가리킨다. 여기에 데이터를 미리 옮겨 놓으면 별도의 절차 없이 더 빠른 속도로 목표에 접근할 수 있기에 값을 다시 계산하는 시간을 절약하고 싶을 때 사용한다.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여 선택된 대상을 가상의 공간에 재배열하였는데 마치 촬영장 처럼 조성된 현장은 여러 대의 카메라가 곳곳을 비추고 있으며 세트나 조명, 소품의 배치 상태가 날 것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는 결과물만을 보여주기보다 하나의 풍경을 구현하기 위한 과정상의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얇은 레이어로 구성된 가벽은 배경 이면의 작동 방식을 어렴풋하게나마 유추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세워진 보관소이자 세트장에서 사인이 떨어지면 멈춰있던 것들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언젠가 발견될 유적과 실현될 예언을 복기하며 예정된 시나리오를 연기하게 된다. 그리고 무심하게 배치된 요소는 정지 되었다가 (살아) 움직이기를 반복하며 스탠바이와 액션 사이에 위치한 가상선을 그려낼 것이다.



글. 신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