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GSAN
김지민 Solo Exhibition
<Prototype Temple : At Night>
26. Oct 2021 - 28. Nov 2021
경계 없는 밤의 무한한 무대
Prototype Temple : At Night 은 영국에서 긴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김지민의 국내 첫 개인전이다.
작가를 알아가며 내가 받은 인상은 김지민의 작업이 '명증(明證)'하다는 것이다. 김지민은 분명한 취향과 예술 실천의 확실한 목적성이 있다. 이런 그의 작업은 체화한 경험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문학, 미술, 음악적 언어를 기반으로 한 리서치에서 발현된 정보를 연구하며 파생된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하고, 그것에 적합한 매체로 작품을 시각화한다. 그런 이유로 김지민의 작업을 보면 작가를 보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 작업 기록과 전후 사유를 꼼꼼하게 정리하는 그에게 작품에서 매체 선택의 당위성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지민은 2019년까지 주로 설치 작업을 했고, 2020년 들어 본격적으로 회화를 시작해 현재 이 두 매체를 병행하여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명료하게 구성되는데, 설치<Art Language>, <움직이는 샹들리에> 시리즈로, 회화는<음악적 회화>, <침묵의 회화> 연작으로 나뉜다. 이번 전시 Prototype Temple : At Night 은 김지민이 설치와 회화의 변주로 동서양의 문화적 융합을 실험해 온 연구의 소산이다. <움직이는 샹들리에>와 <침묵의 회화>로 조합된 전시는 서구 고전 문화를 상징하는 샹들리에와 먹을 사용한 동양적 회화가 어두운 무대에 등장한 것처럼 연출된다. 이에 더해진 사운드는 성가, 성당의 미사, 사찰소리, 종소리 등이 혼합된 동서양의 울림으로, 전체 공간을 공명하며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지민의 작업에서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된 풍경이 출몰하는 이유는 동양과 서양에 대한 작가의 역전된 경험에서 기인한다. 삶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낸 작가는 2년 전 한국에 정착한 이후 어린 시절 경험하지 못했던 동양의 고전에 환상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로 김지민은 '먹'이라는 재료를 연구하며, 동양 철학에서 엿볼 수 있는 '비움이 곧 채움'이라는 사상으로 평면에 무한한 이상 세계를 구현한 선례에 영향을 받는다. 이미 설치 작업으로 물리적 공간에서 흡족할 만큼의 작업 경험을 못했던 그에게 회화는 무한정한 공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와도 같았다. 외형 너머의 세계를 그리고자 한 동양의 미술가들에게 그림이 애초부터 추상이었던 것처럼 김지민의 화면이 이처럼 추상의 모습으로 시각화되는 점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같은 동양 문화에의 심취는 작가가 어릴 적 체득한 서양의 고전 문화가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모습을 낳아 타국과 자국 문화가 만난 제 3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된다. 샹들리에 설치와 동양적 회화가 만나는 이 전시가 그 증거다. 작가 내면의 문화적 혼성 공간이 이번 전시에 현현된 것인데, 부제가 주시하듯 이 배경은 '밤(At Night)'이다. "밤은 윤곽선을 갖지 않는다"는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의 표현처럼 그 공간은 경계가 없어지는 살아있는 시간과도 같으며, 김지민의 작업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왕래하는 자유로운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공간은 일종의 '프로토타입(Prototype)'형식으로, 앞으로 다른 연출을 통해 열리고 닫히는 무대가 될 예정이다. 새로운 장소와 환경에서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하고 결합 되었을 때 상상해 볼 법한 이미지를 그려보며 예상치 못한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다.
전시 출품작에서 <추락하는 샹들리에(2021)>는 김지민이 유일하게 그의 성장 환경을 표면적으로 드러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10대에 영국으로 이동했다. 기숙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대성당을 다녔고, 성가대와 클래식 음악 활동을 이어 나갔다. 김지민의 10대, 즉 정체성이 형성될 시기에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서구 고전의 고급문화와도 다름이 없었다. 작가는 그 안에서 동양인으로서의 정체를 파악하며 감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리움인데, 역설적이게도 당시 이 그리움은 동양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동양과 서양에 속한 작가가 서구 사회에 만연한 고급문화를 겪으면서 느낀 고전시대 문화의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를 향해 갖는 이 같은 기형적 노스탤지어는 환희와 고통을 수반하는 양가적 감정, 바로 작가가 표현한 '숭고'의 감정과도 같다.
김지민은 이러한 경험을 샹들리에에 투사하여 표현하였는데, 이는 전시장에서 움직임을 반복하며 사운드와 함께 연출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샹들리에가 언제나 "주역 배우"처럼 보였다는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 - 1867)의 표현처럼 이는 무대에서 중심이 되고 가장 빛나 보이는 존재이다. 하지만 역으로 홀로 어둠을 이겨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같은 샹들리에는 작가 김지민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가 경험했던 숭고의 양가적 감정이 샹들리에로 대상화되는 것인데, 김지민은 환희와 고통을 수반하는 이 같은 감정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오브제와 매체를 찾았던 것이다. <움직이는 샹들리에>는 작가 본인에게 숭고의 감정을 유발하는 요소들을 모아 무대 형식의 설치작품으로 구현한 일련의 예다.
샹들리에와 조화롭게 설치된 <침묵의 회화(2020)>는 김지민의 회화가 평면으로서 그 자체를 지시하며 공간 안에 존재하는 방식을 고민한 결과물이다. 화면에는 크게 네 가지의 요소가 보이는데, 표현의 기법으로서의 번짐, 재료의 먹, 알의 형상과 금색이다. 침묵의 한자는 가라앉을 침(沈)과 묵묵할 묵(黙)으로 말 그대로 묵묵함이 가라앉는 것을 지시한다. 작가는 이 '가라앉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먹이 화면에서 시간을 두고, 스며들어 번지며 침잠하는 모습으로 구현한다. 무엇보다도 중국어에서 '먹물'의 '먹(墨)'과 '침묵'의 '묵(默)'이 같은 성조로 발음되는 현상을 통해 김지민은 이 재료 선택의 당위성을 찾는다. 침묵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발화 이전, 태초에 코스모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알을 차용하였고, 금색은 "침묵은 금이다"의 속담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연작의 제목에 등장하는 공통된 단어 '침묵'은 비트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했던 '침묵'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화면에서 사물들을 최대한 소거하여 최소한의 메타포만 남기는데, 그 결과 화면의 요소들이 하나의 표상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모종의 신비주의가 뒤따르며, 해석 가능한 풍부한 세계가 연출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일기에서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연습 삼아 조립" 되어 있다고 쓴 것처럼 김지민은 캔버스 공간에 하나의 세계를 조립해 본다. 이는 침묵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세계이다. 작가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증명할 수 없어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증명하려 하여 되려 그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말라는 한 철학자의 깊은 뜻을 미술 언어에 대입해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지민은 동서양에서 체화한 삶의 경험을 기저로 이들이 교차, 융합하는 시점으로 목도한 문화의 다양성과 그것으로부터 파생한 언어, 철학, 종교 등의 주제의식을 작가 특유의 차분하고 숭고한 조형 감각으로 작업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동서양의 종교와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 모습이 융합된 구성으로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연출된 다층적 무대를 설계해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의 끊임없는 화두인 서구 경향의 능동적 수용과 전통, 동양성의 추구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젊은 세대 작가들이 다소 진부하게 여길 법한 주제에서 '다름'을 발견하고 그것을 '새로움'으로 수용하여 변화를 지속하는 김지민의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에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지민은 오늘도 조용히 스스로의 내면에 침잠하여 작업에 정진하고 있다.
글. 이설희 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