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은 Solo exhibition

그리기를 만들기를 그리기

26. Nov - 8. Dec  2021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겸하고 있다. 수업을 하다 보면 그림 그리기가 비효율적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손을 훈련해야하고 색과 명암은 머리로 이해한 후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그린 것을 되돌리거나 지우는 것도 어렵다. 수강생들은 그럴 때, Ctrl + Z를 눌러 되돌리고 싶다고 말한다. 이미지를 만드는 다양한 기술이 있는 현시대에 여전히 몸을 훈련시키고 노동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무의미한 노력으로 보일때가 있다. 그럼에도 오래된 방식(캔버스에 유채, 종이에 연필 등)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스크린이 아닌 실제 공간에서 그림을 만나길 원한다면 이는 단지 시대에 뒤쳐진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일까? 오히려 스크린상의 이미지와의 차이인 신체의 흔적과 그 물질성에서 회화의 이유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들이 떠올랐다.

 

나는 디지털 스크린에서의 이미지 편집(비물질적 그리기)과 물리적 조형(물질적 그리기, 만들기)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오늘날 익숙하게 이미지를 소비하고 생성하는 방식, 그리고 스크린 이미지가 몸을 거쳐 물질이 되는 과정을 담기 위해서 일련의 작업프로세스를 만들었다. 그리는 몸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회화의 언어를 찾기 위해서다. 이 작업에서 나는 두가지를 발견했다.

 

우선 작업과정에서 발견한 몸의 특징은 불완전성, 어긋남, 우연성이다. <How to make>연작은드로잉 어플리케이션인 ‘프로크리에이트’(이하 드로잉 어플)로 만든 그림을 종이에 색연필로 옮겨 그린 후 그림 전체를 접고 오려낸 작업이다. 그림 속 대칭관계의 이미지들은 애매하게 대칭에서 비켜나 있다. 종이 전체를 접고 오리는 과정은 이론상 반복적인 대칭형태를 만드는 일이지만 내 손은 오차를 만들며 완벽한 대칭 만들기에 실패한다. 이 연작은 이미지 수집과 스크린 이미지 편집, 물리적 조형의 단계를 거치며 스크린의 상이 몸으로 번역되어 불완전한 물질이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는 몸의 유동성과 어긋남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업은 <종이 잇기>연작으로, <종이 잇기1>은 드로잉 어플로 만든 그림을 다시 16개의 화면으로 분할하여 그린 후 조합했다. 그림은 매우 섬세하게 그려진 듯하지만 합쳤을 때 이미지의 경계가 어긋나고 각 화면마다 색이나 색연필의 강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의도적으로 맞추어 그리지 않는다면 그릴 때마다 신체 감각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Keep going>과 <만들기를 그리기를 만들기> 역시 화면을 분할하여 그렸다. 유채로 그린 두 작업은 물감의 섞임, 두께, 질감, 층위 등 그 자체의 물질성이 더 두드러진다. 회화 화면의 물질성에는 몸의 흔적과 함께 재료의 특성도 담기기 때문이다. 정사각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Allow or block>, <If I were in your place>, <Orbit> 등에서도 몸짓의 흔적이 담기는데, 이는 힘에 따른 물질적 흔적, 취향과 감각에 따른 선택, 우연한 효과와 같은 특징으로 나타난다.

 

두번째로, 그리기는 새로운 그리기를 만든다. 2018년 개인전 <Colored Lenses>에서는 회화에서 수집한 색을 수채로 드로잉한 <색채수집>에서 색을 발췌하여 다른 작업에 사용하였다. 현재는 <색채수집> 작업을 드로잉 어플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색 뿐 아니라 드로잉을 하며 생겨나는 형태도 다른 작업의 재료가 된다. <How to make>연작에서는 <색채수집>의 색과 형태가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는 중에 생겨나는 형태를 추가하거나 오려냈다. 그림의 소재가 끊임없이 그림으로부터 나온다. 또한 그리고 만드는 중에 생기는 아이디어는 다음 작업을 유도한다. <Keep going>에서는 정원과 정사각이라는 완전한 도형 지지대 위에 이미지를 분할하여 그렸다. 이 작업 이후 <만들기를 그리기를 만들기>에서는 사물이었던 원형과 사각의 틀을 캔버스 위에 그렸다. 이미지의 바깥, 흰색부분은 공백의 역할과 이미지의 역할을 오간다. <How to draw a circle> 시리즈는 원을 그리는 법을 수행하는 과정인데, 여러 방식으로 접고 오리고 화면에 옮겨 그린다. 하지만 완벽한 원을 그릴 계획은 몸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실패하고 접기, 오리기, 그리기라는 몸짓의 노동만 남긴다. <Keep going>, <만들기를 그리기를 만들기>, <How to draw a circle>는 조금씩 어긋나며 반복되는 말장난처럼 완벽한 도형 그리기를 수행하고 실패하며 다른 방식으로 이어받아 또다시 실패한다. 과정과 과정은 화면에 몸의 감각과 움직임과 힘의 질감을 남긴다. 작업들은 일종의 외래어를 한국어로 고쳐 말하거나 리을과 이응을 바꿔 말하는 끝말잇기처럼 변주를 통해 앞선 그리기는 다음의 만들기로, 다시 그리기로 이어진다. 요약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몸의 수행은 늘 실패하고 그곳에서 또다른 색과 형태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화면은 정지된 무엇이 아니라 또 다른 그림 그리기를 예고하는 역동적인 물질이 된다.

 

내가 가르치는 수강생들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정하고 이를 다시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진보다 본인이 그린 그림을 소중히 여긴다. 사진의 복제가능성 때문에 생기는 상대적 가치하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동시에 스크린상에서도 이미지로서 부족한 점이 없기에 물리적 그리기는 등산로에 쌓아 놓은 돌탑처럼 ‘굳이’한 노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등산로의 돌탑은 그 자체는 일견 무의미해 보이지만 누군가 그것을 쌓았던 몸과 시간의 언어로서 삶을 가진다고 여긴다. 즉 그것은 명사로서 무언가 라기보다 동사나 형용사로서 존재하는 덩어리일 것이다. 나는 회화에 몸의 움직임과 시간을 담아 나갔다. 그것은 흔들리는 손과, 취향과 선택, 틀리고 실패하는 것이 언어인 말하기이다. 나에게 회화는 그리는 행위이고 그 흔적으로서 물질성을 긍정한다. 

 /홍해은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