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Review: 

Space oddity¹)

문소영

필자가 전시를 관람한 방식인 사진 갤러리와 촬영된 영상의 스크린샷.

전시장을 방문하지 않고 리뷰를 쓸 수도 있을까? 얼마 전 방문한 아트페어에서 영상 통화로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하던 사람을 보고 떠올린 생각이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는 2021년이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다. 팬데믹 이후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할 일 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시간도 늘어났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인터넷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스크린을 통해 누군가가 남긴 생기 넘치는 과거들이 시커먼 방에 누워있는 내 얼굴 위로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종종 만난 적 없는 사람이나 물건들이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고, 때론 보이는 것들의 진위를 가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정보의 바닷속에서 정처 없이 헤엄치다 보면, 무언가 얻어지고 채워지기보다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은 허망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실체가 없는 탐험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부스러기 하나 없이 요점만이 말끔하게 걸러진, 체화된 적 없는 경험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필자는 Planet HTRAE Project(이하 P.H.P.) 전시장을 방문하지 못했다. 다만 참여 작가 3인의 작업을 2017년부터 지켜보았고, 이전에 몇 차례 다른 전시를 보기 위해 상업화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진과 영상만을 보고 리뷰를 적는다는 것이 게으르고 터무니없게 느껴질 것이다. 필자 역시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 전시와 작업을 판단하는 것에 회의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는, 우선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이미지와 정보를 통해 작업을 어디까지 파악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고²), 한편으로는 우주적인 전시의 콘셉트와 어울리는 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탐사선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학자의 자세로 신중하게 원격 관람에 임했다. 메신저를 통해서 영상 기록과 글을 전송받고, 관객들이 SNS에 올린 다양한 시각의 사진들과 온라인에서 수집된 자료를 통해 전시를 간접 체험했다. 관람 동선에 영향을 받는 작업이 있어서 김명진 큐레이터가 동선을 따라 찍은 영상을 보내주었다. 구글맵의 스트릿 뷰를 들여다보거나 화상 탐사선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기분이 들었다. 목조 벽의 느낌, 1층의 전시를 보기 위해 왼쪽으로 틀었던 몸, 2층의 전시를 보기 위해 올라섰던 계단과 전시장에 들어서기 위해 턱을 넘어가던 움직임을 떠올리며 영상 속의 전시를 보았다. 영상이 담지 못하는 작품의 세부적인 부분은 전문적으로 촬영된 사진을 참고했다. 이후 작가들과의 줌 미팅을 통해 작업에 대한 보충 설명을 들었고, 간접적으로 관람을 하느라 생긴 여러 오해들을 정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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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P.의 4인의 미술인(기획자 김명진, 작가 김은주, 이문영, 조미형)은 2019년부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1980) 독서 모임을 시작으로, 함께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흥미를 느낀 부분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그것을 다시 각자의 작업으로 소화해왔다. 첫 번째 결과물로서 2020년 진행된 《Celeste》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가설을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천문학자와 예술가를 동일 선상에 놓고, 우주적 개념의 소리, 빛, 시간 등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형상화했다. 《Celeste》가 천문학적인 이론을 미술에 결합시켜보려는 시도였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구체적으로 지구화³)라는 개념을 빌려 예술의 역할에 대한 조금 더 실천적인 질문을 던지고, 하트레라는 가상의 행성을 통해 우리가 아는 세상 바깥에 존재할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표방한다.


김은주는 사소한 장면이나 물체가 빚어내는 ‘반짝임’을 회화로 구현하는데, 빛나는 것을 탐구하고 그것을 구체화시킨다는 점에서 별을 향한 천문학자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그의 그림에서 ‘반짝임’이라고 하는 것은, 단어 그대로 작은 빛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을 말하기도 하고, 관찰하던 대상이 그리고 싶은 형상으로 감각적이고 명확하게 떠오르는 순간을 말하기도 한다. 김은주의 회화는 멀리서 보았을 때는 납작하고 단단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그 면들이 다양한 호흡으로 리드믹 하게 채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유성 혹은 바람에 흩날리는 돌가루처럼 작은 형상들이 화면 위에 굴러가듯 흐드러져 있기도 한다. 김은주의 회화는 현미경 혹은 작은 구멍을 통해 관찰한 듯한 미시적 이미지를 통해, 몸통의 일부만을 드러내 육중함을 암시하는, 화면의 바깥에 존재할 거시적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예를 들어서, <하늘 조각>은 작가가 창문을 통해 바라본 장면을 그린 것이지만, 조미형의 <은하경작 1>의 궤도를 달리는 듯한 푸른빛과 공명하며 대기를 가진 행성의 모습처럼 떠오른다. <작은 빛>시리즈는 보편적인 관람 동선에서 벗어나 천장 가까운 벽의 모서리 등 주의를 기울여야 발견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섬세하게 조율된 그림의 배치는 관람객의 시선을 공간의 단위로 확장시킨다. 


조미형은 하늘에 펼쳐지는 은하수, 물결, 식물처럼 자연으로서 현상하는 것들을 체화될 때까지 충분히 관찰하고, 매만지고 빚어내듯 작업으로 옮겨왔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하게 되는 민들레를 시작으로, 깊고 검은 궤도 위를 울트라 마린 빛의 행성들이 가로지른다. 푸른빛의 원판 위로 전략적이고 규칙적으로 배열된 씨앗들이 보이고, 이내 화면이 파종하듯 붓 터치를 남긴 회화 작업으로 넘어간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거대한 힘이 응축된 작은 점으로부터 시작됐다. 우주가 점으로부터 시작됐듯, 씨앗 속에도 우주가 있다. 씨앗은 자신 안에 있는 우주를 팽창시키기 위해 자신을 파괴해야만 한다. 식물은 따듯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알고 보면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지속시키기 위해 은밀하고 치열한 싸움을 하는 존재들이다. <은하 경작>에서 씨앗은 타 행성을 지구화하는데 동원되는 군대로 설정된다. 지구화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개척이지만, 행성과 그곳의 원주민들에게는 침략이 된다. 식물의 씨앗은 효과적으로 퍼져 나가기 위해 각자의 전략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작가는 이러한 씨앗의 형태적 특성을 작업에 활용했다. 판위에 펼쳐진 씨앗의 형태는 실제 파종의 방법을 따르는데, 일렬종대로 서있는 군대의 차갑고 규칙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고 분사하듯 파종된 형태는 하늘에 펼쳐진 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하 경작>시리즈는 멀리서 볼 때 감각적인 패턴 혹은 우주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섰을 땐 규칙에 맞춰 파종된 씨앗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의해 선별되고 파종된 식물 군대의 이미지는 팽창하는 우주와 그 안에서 살기 위해 서로를 침략하는 존재들을 동시에 상기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자행하는 폭력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문영은 이미지와 사유의 경계에 주목하고, 배제되거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섬세한 조형물로 표현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이문영은 <여백의 일기>를 통해 만유인력, 지구 온난화, 미세먼지 등 자연현상에 대한 단상을 은유적인 텍스트로 담고, 그 텍스트를 다시 조형물로 번역하여 공간에 그려 넣는 것을 시도한다. 바닥에 그리드와 같은 지지대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그 위로 견고해 보이지만 실은 가볍고 유약한 스티로폼 구조물이 작은 조형물들을 붙잡고 있다. 구조물은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그 유약함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손에 잡힐 듯 보이지만 실체는 증기인 구름처럼, <여백의 일기>는 부드럽지만 선명하게 그 윤곽을 드러낸다. 공간 가운데 보이는 그리드가 바닥 아래로 다른 차원이 있음을 드러내지만,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은 오직 제공된 트랙뿐이다. 우리는 늘 날씨 속에 있다. 인간은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날씨를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여전히 날씨는 운명에 가까운 현상이다. 얼마 전 두 명의 물리학자가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가 4차원의 공간에서 설계와 건축을 문학적으로 구현하려던 시도였다는 것을 증명했다⁴). 보이지 않는 세상은 늘 매력적이고, 그것을 품고 증명하는 방식에는 영역이 없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⁵). 지식에는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그 한계를 언제나 뛰어넘기 때문이다. 상상이라는 것은 언뜻 무용해 보이지만, 모든 이론은 가설로부터 시작된다. 지구화의 토대를 제공한 것은 소설이라는 창작물이었다. 우리는 나무(일부)만을 보고서 숲(전체)을 오해하기도 하지만, 눈에 담기는 미시적 세계 외부에 다른 영역이 있을 것이라는 직관을 통해 세상을 확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전하고자 하는 모든 언어를 나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정보를 통해 얻은 이미지를 도출하고 또 다른 가설을 파생시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열렬한 연구를 통해 함축한 의미가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형상으로 드러날 때만큼 짜릿한 순간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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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으로 전시를 관람하는 것의 장점은 물리적 제약 없이 좋은 전시를 관람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동선을 정할 수 없다는 것과 기술의 한계나 타인의 취향에 의해 재단된 시점만을 볼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또한, 타인의 눈을 빌려 다양한 각도로 전시를 볼 수 있었지만, 진공상태가 아닌 여러 가지 시선이 혼재된 상황의 관람인 만큼 스스로 전시에 대해 사유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온라인 매체를 통한 관람이 늘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각적 체험을 폭넓게 공유하고 교류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2050년에는 지구 온난화가 심화돼서, 야외 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더운 기간이 길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때는 정말 가상공간을 통해서만 전시를 관람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코로나가 종식되고 지구 온난화도 잘 해결되어 더 많은 전시 공간을 찾아다닐 수 있는 미래가 오길 바라본다.

¹) 데이비드 보위가 1969년 발표한 곡으로, 지상관제소와 우주 비행사 톰 소령의 대화가 주된 가사의 내용이다. 실제 우주비행사 크리스 해드필드(Chris Hadfield)가 국제우주정거장 내에서 이 곡을 커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곡에서는 톰 소령이 사고로 우주 미아가 되는 가사가 등장하는데, 해드필드이 커버 곡에서는 우주선이 지구로 무사 귀환하는 내용으로 개사 된다. 


²) 실험의 일환으로, 인테러뱅 프로젝트를 통해 팬데믹/비대면 상황에서의 작업 여건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www.interro-bang.org) 


³) 지구화 혹은 테라포밍(Terra-forming)이라는 단어는 행성의 대기를 조정하여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꾼다는 개념으로, 1942년 잭 윌리엄스의 SF소설 『충돌 궤도(Collision Orbit)』에서 처음 등장했다. 날씨를 관장한다는 설정은 과학자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시작은 허구였지만, 테라포밍에 관심을 갖게된 과학자들이 이를 가능성있는 개념으로 다듬고 학설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961년 칼 세이건이 『사이언스』지에 금성을 테라포밍하는 개념을 소개했고, 이후 화성이 테라포밍의 가장 유력한 대상으로 거론되며 지금까지도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⁴)「천재시인 이상 詩 ‘건축무한육면각체’ 수수께끼…90년만 물리학도가 풀었다」,『해럴드경제』,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10919000114, (2021.10.20.)


⁵) 1929년 “The Saturday Evening Post”에 실린 조지 실베스터 비렉과의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