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Conversation: COSMOS

김명진



《Planet HTRAE Project》(이하 P.H.P.)의 기획자와 작가 3인(김은주, 이문영, 조미형)이 걸어온 ‘여정’의 대부분은 책을 매개로 한 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2020년에는 대표적인 천문학 대중서/입문서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모두 읽었고, 그 과정에서 전시 《Celeste》(2020.5.13-5.29, 예술공간 서:로)를 진행했습니다. 이후 2021년에는 코스모스의 후속 버전인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을 함께 읽으며, 계속해서 천문학과 미술 생활을 연계해보았습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자연과 미디어』 등을 함께 다루었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여정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코스모스』 시리즈와 함께한 시간일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P.H.P. 전시 기획의 기반이 된 2021년 스터디 가운데 나누었던 대화 중 일부를 발췌·편집하여 공유하고자 합니다. 스터디는 각자 정해진 분량을 읽고 흥미로운 지점을 ‘질문’으로 만들어 질의응답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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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12. 대화 기록


앤 드루얀, 김명남 역,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사이언스북스, 2020.



프롤로그: 꿈은 지도

프롤로그에서 앤 드루얀은 1939년 뉴욕 세계 박람회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당시 아인슈타인의 연설 일부를 소개한다.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필자는 아인슈타인의 이 말이 “예나 지금이나 「코스모스」 프로젝트의 변함없는 꿈”이라고 밝힌다(26쪽).


명진) 저는 아인슈타인의 연설과 이에 대한 앤 드루얀의 해석이 마치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 선언문처럼 읽혀서 재미있었어요. 과학이 대중의 일상 영역과 겹쳐지는 지점을 강조하면서 그 사명을 굳이 ‘예술’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까지요.

은주) 저는 프롤로그에서 아인슈타인의 연설을 ‘과학과 예술의 접점’에 집중해서 읽었어요. 찾아보니 최근 뉴스 기사들에서도 과학과 예술을 연결하는 문장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걸 볼 수 있었고요. 예를 들어, “화학자는 만들어질 분자를 선택하며, 분자를 선택하는 일은 예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위대한 과학자는 위대한 예술가와 같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말들이요. 저는 ‘예술이 과학과 대등하게 위치될 정도의 것인가?’ 생각하다가 다빈치 같은 사례를 떠올리며 근대 이전에는 과학자와 예술가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지금 작업을 하는 우리는 어떨지 궁금해져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Q1. 우리가 하고 있는 미술 안에서의 과학은 어떤 의미에서의 과학일 수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들은 작업 안에서 무엇일 수 있을까? (질문자: 김은주)


은주)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생각해보면 먼저 미술가들이 보는 방식도 기술적인 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 예를 들어 저에게 ‘미술하기’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나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염두에 두고 보는 것에 가깝다는 점을 떠올렸어요. 

두 번째는 작가들의 연구자적인 태도에 관한 것이에요. 저는 점점 작가가 매체를 얼마나 과학자처럼 연구하고 리서치하고, 그 과정이 체계적인가에 따라서 점점 더 프로페셔널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재료나 미디엄을 실험하는 과정, 혹은 실제 사물에서 시작해 이미지를 도출해내는 자신만의 과정 같은 것이요. 저는 주로 즉흥적으로 작업을 했던 사람이어서, 앞으로 좀 더 발전하려면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해요.

문영) 저는 대학생 때와 지금 작업이 꽤 달라요. 예전에는 교수님이 저한테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도 하셨고, 공학적인 요소를 좋아해서 작업에 많이 접목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대학원을 조소과로 가고 나서는 오히려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과학이나 기술이라기보다 미술에 있어서 필요한 것에 집중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VR, 3D프린터, 아두이노 등의 기술을 사용해 작업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이런 상황에서 은주 씨의 질문을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기술을 갖추긴 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미형) 저는 프롤로그의 이 문장이 좋았어요. “우주에서 우리의 진정한 처지, 생명의 기원,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 여정은 영적인 탐구다(33쪽).” 제가 어렸을 때 꿈이 과학자였고, 항상 스스로 질문했던 진짜 관심사가 이거였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원래 내 존재에 대한 궁금증, 생명에 대한 호기심, 세계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자연물을) 관찰하게 되고, 시각적으로도 더 학습하려고 한 건데, 미술을 하다 보니 미술 안에 갇히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미적인 것 안에서만 사고하게 되고 심미주의자적으로 되어버린다거나. 이제는 미술이 제 원래 관심사에 방해되지 않고 도움이 되는 활동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문영) 저도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때 꿈이 화가이면서 식물학자였어요.

미형) 어렸을 때는 이렇게 뭔가 다 통해 있는데, 전공을 하다보면 분리되어 버리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7장 : 지구의 지적 생명체를 찾아서

7장은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최초의 만남에 대비되어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다른 종 사이의 소통이 이 장의 주제이며, 그중에서도 꿀벌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시도들이 주된 내용이 된다. 이처럼 지구 내 다른 지적 생명체의 언어를 독해하려는 시도는 먼 미래에 이루어질 우주 생명체와 소통할 수 있는 이해의 초석이 될지 모른다.


Q1.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생명체는 이미 수학과 과학을 기반으로 한 신호체계를 이용하여 의견을 주고받는다. 과학, 수학 언어가 동종 혹은 이종 간의 소통이 가능한 공통 언어라면, 시각 언어는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일까? 혹은 나의 시각 언어는 무엇을 위해 개발되고 있는가? 각자가 생각하는 시각 언어의 의의를 나누어보자. (질문자: 조미형)


미형) 거대 질문이죠? 7장에서 꿀벌들이 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은 과학적인 연산을 바탕으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블록체인(Block Chain) 기술이 꿀벌의 의사소통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명진) 그 부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미형) 저는 블록체인 기술이 결국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수학 연산을 이용해서 (하나의 공통된) 의견을 합치시키는 기술이라고 이해했거든요. 그것이 합치되었을 때 새로운 체인이 체결되는. 책에서 소개된 꿀벌들의 소통 과정을 보면, 앞에 나선 꿀벌들이 겨울에 날 구멍을 찾고 돌아와서 그곳의 위치를 자기들이 계산한 움직임으로 알려 주는 거잖아요. 과학적인 계산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고, 많은 꿀벌들이 동의하는 곳에 집을 짓게 되는데 저는 그 과정을 보고 블록체인 기술을 생각했어요. 여러 컴퓨터들이 방금 이루어진 계산 값을 맞춰 보고, 많은 컴퓨터들이 ‘이게 맞다’ 하면 그걸로 체결되는 과정이 떠올랐고요.

그리고 인간이 꿀벌의 언어를 발견한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인간이 시간과 거리의 개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꿀벌의 움직임을 계산해서 그 움직임이 거리를 나타낸다는 걸 알아낸 거잖아요. 인간은 수학적, 과학적 측면에서 꿀벌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 외계에서도 소통될 가능성이 높은 이종 간의 공통 언어를 수학과 과학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미술은, 시각 언어의 소통 범위는 어디까지일지 궁금해졌어요. (미술이)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이해시키기가 힘든데, 무엇을 위해 어떤 기능을 하는 걸까? 꼭 소통이 아니더라도 감각을 촉발시킬 수도 있고,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그렇다면 시각언어는 어떤 부분에 특화되어 있을까? 

명진) 저는 시각 언어와 과학의 신호 체계를 딱히 구별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일단 벌들의 춤도 일차적으로 시각 언어이고, 시각으로 관찰해서 공식으로 만든 거잖아요. 일차적으로 시각 언어고 그걸 이차적으로 공식화할 때 수학이랑 과학이 되고, 그걸 또다시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시각 언어로 바뀌고, 이렇게 치환되는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컴퓨터의 언어도 그래픽 인터페이스로 치환되어야지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좀 다른 질문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여러분은 미술이 ‘언어’라고 생각하시는지? 시각 언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자체도 궁금해요.

은주) 저는 그림(혹은 작업)을 ‘읽어낸다’는 느낌으로 볼 때도 많아요. 작업을 많이 봐야 되는 이유가 잘 해석할 수 있어야 되고 감각할 수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저는 전시를 보는 게 눈을 훈련시키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눈이 좋아야 나도 좋은 걸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개념에 있어서는 ‘시각 언어’가 맞지 않을까.

미형) 어떤 작가들은 말이나 글보다 미술로 생각이 더 잘 전달되잖아요. 그림 하나만 있는데 ‘저 사람이 저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이런 게 깜짝 놀라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미술이) 생각이나 삶을 전달한다는 느낌이 들 때 보면 언어인 것 같기도 해요.

은주) 삶을 전달한다는 말이 와 닿아요. 저는 어떤 작업이 좋으면 그 사람이 궁금하거든요.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았기에 이런 작업을 하는 거지?’ 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나, 그 삶이 정말 알고 싶은 것 같아요.

미형) 살아온 방식이 표현에 반영될 때 되게 신기해요.

은주) 그러면 여러분은 본인의 작업으로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고 싶으세요? 미형 씨의 질문을 대입해서 본인의 작업을 통해 대답을 한다면, 자신의 작업이 무엇을 가능케 하는 언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것도 궁금해요.

미형) 제 질문이 엄청 거대 질문이죠? 평생 연구해야 하는... 저는 제가 아까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했던 “우리의 진정한 처지,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들이 느껴질 수 있는 작업으로 다시 정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꼭 과학 기술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닐 거잖아요? 미술에서도 그런 것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은주) 전 오히려 심미적인 것에 심취해서 그 이상의 거대 목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요즘 그 부분에서 생각이 많거든요. 내가 보는 이미지 안에서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발현시키고 싶었는데 그 안에서 ‘더, 더’를 바라는 피드백도 있어서, 조형성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나? 그런 고민을 해요. 어렵더라고요. 최근에는 ‘나의 시각 언어는 무엇을 가능하게 할까’ 생각했을 때, 좀 더 촉각적인, 공감각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면 성공 아닌가? 나의 그림 안에서 시각을 통해서 다른 촉각들이 발현되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되고, 그런 게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바람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미형) 확실히 미술을 많이 경험하면 안 쓰던 감각이 자극되는 건 느끼지 않아요? 일상에서는 다양한 감각이 퇴화되는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이 자극되는 느낌 받을 때 너무 좋고, 그런 작업을 봤을 때 좋은 작업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 같아요.

명진) 동의해요. 미술 일을 하며 좋은 점은 뇌가 계속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인 것 같아요.

Q2. '경험의 아치'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볼 수 있다면, 어떤 다른 생명체 혹은 존재가 되어보고 싶은가? 혹은, 우리는 다른 존재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을까(인간으로서의 '1인칭 시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질문자: 김명진)


명진) 7장 후반부에 나오는 ‘경험의 아치’ 개념을 보고 단순한 질문을 만들어 본 것인데요. 앤 드루얀이 다른 생명들과 우리의 연관성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상상하잖아요. “우리가 언젠가 생명에 대해 쌓은 지식을 모두 발휘해서, 그 밑에 서면 다른 생명체가 되는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경험의 아치'를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266쪽).” 저는 생각보다 이걸 상상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문영) 제가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게 힘들잖아요. 시험공부하고, 혼나고 그런 게 힘들면 ‘아, 그냥 돌멩이였으면 좋겠다.’ 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누가 날 건드려도 아프지도 않을 거고. 그러다 나중에는 ‘돌은 좀 지겹지. 바람이 되면 좋겠다.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산 위를 막 날아다니고, 지구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작년에는 「개가 되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실제로 저희 집에 대형견이 있잖아요. 걔랑 같이 하루 동안 엎드려서 기어 다니고, 소통을 해 보려고 했어요. 걔가 항상 베란다에 앉아서 뭐가 보이면 막 짖거든요. 걔가 짖기 전에 베란다에 가서 보다가 제가 먼저 짖고, 그럼 개가 와서 같이 짖고. 그런 걸 해봤었죠.

명진) 어떠셨어요?

문영) 그렇게 하면 시각이 정말 달라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평소에 서 있을 때 보이는 시각은 항상 편한 위치에 모든 게 놓여 있는데, 조금만 몸을 숙여도 불편하잖아요. 당연히 보였던 게 안 보이고, 필요한 게 없고... 세상이 사람한테 모든 게 맞춰져있구나. 예를 들어 우리는 신발 신고 다니니까 한여름에 바닥이 얼마나 뜨거운지 잘 모르지만, 예전에 강아지 처음 데려왔을 때 한여름에 산책을 하는데 애가 바닥에서 발을 엄청 빨리 떼는 거예요. 그리고 자꾸 그늘로 가기에 손을 콘크리트 바닥에 대 봤는데, 정말 생각 이상으로 뜨거웠어요. 우리가 모르고 사는 부분이 많은 거죠.

미형) 저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신이 되고 싶어요. 모든 존재가 무지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잖아요, 미래도 그렇고 자기 존재도 그렇고. 신은 그런 것에서 벗어난 존재,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해서요. 그런데 질문 뒷부분에 ‘다른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인간의 1인칭 시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문장을 보니까 신도 1인칭으로 살 것 같은 거예요. 자기중심적일 것 같고, 신도 다른 존재의 입장을 이해 못 하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과 관련된 영화가 있었는데, 신이 알고 보니 이 세상을 컴퓨터 게임 안에서 설계를 한 거예요.

명진) 이 영화 전에도 말씀하신 것 같은데. <이웃집에 신이 산다>.

미형) 맞아요. 그 영화에서 신이 굉장히 자기중심적 성향으로 묘사되어요. 생각해보니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모든 것을 설계한 존재이거나, 아니면 가장 자기중심적인 존재일 것 같아요.

명진) 인간이 상상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미형)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1인칭 시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껴요. 보편적으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 생각이 확고해지면서 소통이 전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류의 역사가 전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건 전부 다 의견 싸움이잖아요. 종교 전쟁, 정치 전쟁, 이념 전쟁. 이건 영원히 안 멈출 것 같고, 그게 합치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것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나도 어느 순간에는 완전 확고한 내 생각으로만 가득 찬 노인으로 죽을 것 같아요.

명진) ‘경험의 아치’ 상상하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도 이해를 못 하잖아요. 다른 존재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게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일일까? 이런 게 있다면 우리가 먼저 경험해봐야 되는 건 다른 사람의 입장이지 않나? 예를 들어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의 입장을 경험해 본다든지. 그런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었어요.

미형) 전 지구 안이 이미 외계로 가득 찬 것 같아요. 나 빼곤 다 외계잖아요. 옆에 있는 사람도 외계인이고. 그 정도로 소통이 안 된다는 거죠. 정말 외계인만 소통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식물도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동물도 모르고, 옆 나라 사람도 모르고, 내 친구 생각도 모르고. 부모 생각도 모르고... 전 저 빼고 다 외계인 같을 때가 있어요.

문영) 안다고 생각해도 사실 서로 다 다르죠.

명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면, 7장 중반부에 나무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저자가 “나무는 지적 생명체일까? 나무가 어떤 일을 해내는 것과 우리가 하는 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244쪽)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부분에서, ‘언타이틀 플랜트’ 운영자인 미형 씨가 나무들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어요.

미형) 여러 이야기에서 나무가 많은 생명을 품어주는 지혜의 상징처럼 묘사되고, 이 지구에 공기를 비롯해 너무 많은 것을 준다고 하잖아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하고, 나무뿌리가 산사태를 저지해 줬다고도 하고. 그런데 이건 다 인간의 관점인 것 같아요. 나무들은 그냥 자기가 살려고 하는 거고, 공기 정화가 아니라 나무들은 이산화탄소가 있어야 호흡을 하는 거죠. 책에서 앤 드루얀도 이 부분을 질문해요. “나무들은 생존 법칙으로 이렇게 한 것뿐일까?” 여기에 대해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제가 예전에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갔을 때 나무가 너무 많았어요. 우리가 본 대한민국의 나무는 그늘 주고, 꽃 피워 주고, 적당한 자기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마다가스카르는 완전히 달라요. 인간이 많으면 인간끼리 싸우듯이 나무가 너무 많으면 나무끼리 싸우고, 나무가 나무를 잡아먹어요. 예를 들어 위에 있는 나무들이 가려서 아래에 있는 나무가 빛을 못 받으면, 다른 나무들이 못 자라게 파고들어 죽여 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해요. 그리고 나무의 형태도 각자 자기 생존을 위해서 모양이 너무 다른 거예요. 빛이 잘 없는 곳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나뭇가지들이 수평으로만 뻗어있는 모습을 봤어요. 비가 별로 안 오니 모두 고루고루 비를 맞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 높낮이가 다르지 않게 수평으로. 가지들 사이의 생존의 평등함을 위해 그렇게 자란 거예요.

문영) 어떤 식물은 자기 종이 살기 위해 독성을 내뿜어서 다른 종이 살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미형) 잣나무가 그래요. 잣나무가 있으면 그 자리에 다른 수종이 잘 안 되고 잣나무 밭으로 바뀌어요. 그리고 어떤 나무는 아주 오랫동안, 심하게는 오백 년에 이르기까지 씨앗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나무도 있어요. 이 땅에서 수종이 이것저것 자라고 있을 때는 경쟁자가 너무 많으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산불이 날 때를 기다려서 연기를 받으면 씨앗을 퍼뜨리는 거예요. 불에 타서 다른 나무들이 다 죽었을 때, 재가 양분이니 양분도 풍부해지잖아요. 최장 시간 관찰된 게 오백 년을 기다린 거라고 해요. 이렇게 보면 생존 법칙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지적인 생명체들인 거예요. 사실 곤충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인간의 입장에서 해충과 선한 나무로 갈라놓았지만 모든 존재는 선악보다는 생존본능이 가장 무성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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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14. 대화 기록



9장: 거짓 없는 마법

9장은 빛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언제나 빛에 매료된 과학자들은 빛을 구성하는 더 작은 단위를 분리해 낼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 기존의 물리 법칙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이상한 나라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311쪽).” 저자는 빛을 이해하려 노력해온 과학사의 흐름, 뉴턴의 ‘빛의 입자설’과 하위헌스의 ‘빛의 파동설’, 빛의 최소단위인 광자를 ‘이중 슬릿’에 통과시켜 파동에 의한 간섭 패턴을 관찰한 실험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20세기 말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는 기묘한 결과가 나타났다. 관찰자가 지켜볼 때에는 광자들이 똑같은 크기의 두 덩이로 나뉘어 모인 모습이 나타났고, 지켜보지 않을 때에는 두 파동의 간섭 패턴이 생겨난 것인데, 그 원인은 아직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Q1. 광자를 비롯한 기본 입자들은 관찰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각예술가의 입장에서 작가가 관찰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이미지의 생태로 변화하는 물질 및 순간을 만난 경험이 언제인가? 혹은 매 작업 때 그러한 경험이 이루어지는가? (질문자: 김은주)


은주) “광자든 전자든 다른 어떤 기본 입자든, 우리가 관찰하기 전에는 확률 법칙에 따르는 불확실한 상태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전혀 다른 상태로 바뀐다(314쪽).” 저는 이 구절을 보고 시각예술가가 작업을 끌어내는 시점과도 맥락이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명진) 저도 9장에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관측한다는 사실만으로 패턴이 바뀐다면 관측자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지켜보는 존재가 아니라, 관측한다는 행위 자체가 분자 세계에서 뭔가를 바꾸고 있다는 거잖아요.

미형) 저는 이 질문을 보고 루시언 프로이드(Lucian Freud)의 어느 인터뷰가 떠올랐어요. 인터뷰에서 사생이 굉장히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보고 그리는 순간 이미지가 변한다고 말하는데요. 만일 모델이 아무 움직임 없이 있다고 하더라도 존재 자체로 계속 변하고 있잖아요. 제가 느끼고 해석하기로는 루시언 프로이드가 그 정도 단위로 이야기한 것 같았거든요, 살아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매 순간 변한다는. 그래서 눈으로 포착해 손으로 가는 순간 시차가 생기고, 자신은 항상 ‘늦은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한탄 같은 것을 이야기해요.

저도 사생을 하다가 요즘 관심이 좀 떨어졌는데, 그 이유가 너무 어려워서예요. 많은 작가들이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게 대부분이 되었는데 (사생과)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사진은 시점이 고정되어 있고 볼 수 있는 디테일도 고정되어 있는데, 눈은 근육이니까 계속 조리개를 조절하잖아요. 내 몸을 보는 도구로 이용하게 되면 시점을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는 투시도법이나 명암법 같은 것에 아예 흥미를 잃었고, 오히려 동양화의 이동 시점에 흥미가 생겼어요. 동양화에서는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시점이 계속 변한다는 관점에서 사물을 다시점으로 그리는 기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물질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훨씬 우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에 적합한 답인지 모르겠는데, 저는 이처럼 우리가 시각적으로 관찰할 때 쓰는 방법과 실제로 우리 몸이 쓰는 방법의 차이를 떠올렸어요. 우리는 대개 고정된 시점과 고정된 디테일을 보고 창작을 하고 있잖아요. 실제로 그건 몸을 쓴다기보다 도구를 쓰는 거죠. 도구가 보는 어떤 이미지를.

은주) 공감해요. 저도 작업 노트에 ‘내 손이 항상 느리다’고 썼었거든요. 실제로 만났던 이미지와 내가 감각하고 그리고자 하는 그 이미지는 다르고, 그걸 소화하는 손은 더 느려서, 내가 항상 더뎌서 이미지를 다 수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열 개의 그림이 있다면 실제로 물리적으로 해내는 건 한두 개뿐이고 나머지는 휘발되는 느낌이에요.

저는 최근(스터디 당시)에 ‘루이즈더우먼(시각예술분야 여성 예술인 네트워크)’에서 사생 드로잉 모임장을 하고 있어요. 눈과 손을 자유롭고 편하게, 감각으로써 그리기의 기본적인 유희를 작가들과 나누면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작가들은 미술을 프로페셔널한 일로 접근하다 보니 오히려 사생이라는 걸 등한시하거나 터부시하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아서요. 참여하신 작가 분들이 다들 눈과 손을 이용해 실제 자연물을 보면서 드로잉 하는 게 오랜만에 하는 감각이어서 재밌어하시더라고요. 저도 이게 바로 작업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경험이 다른 식으로 영감의 소스가 되기도 하고, 감각이 열리게 해 주는 차원에서는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문영) 사생 드로잉 모임 때 조각이나 설치 작가 분들도 계셨는지 궁금해요.

은주) 상대적으로 비율이 적지만 회화 외에 다른 매체이신 분들도 참여하셨어요. 회화 작가가 아닌 분들의 경우 드로잉의 결이 어떻게 나올지 미리 예측할 수 없었는데,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던 것 같아요.

Q2. 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인 ‘위’를 상상하는 노력이 바로 과학이라고 말하지만, 충분히 미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플랫랜더’로서 우리가 상상하는 ‘위’의 모습은 어떠한가? (질문자: 김은주)


부가 설명: 9장의 후반부에서 앤 드루얀은 에드윈 애벗(Edwin Abbott)의 『플랫랜드(Flatland)』(1844)에 대하여 “양자 세계에 관해 생각해 볼 때 입문서로 쓸 만한 최고의 책”이라고 소개한다. 『플랫랜드』는 2차원 세계에서 사는 거주자들의 이야기다. 완벽하게 납작한 그 세계의 거주민들은 앞이나 뒤로 갈 수는 있지만 ‘위’로 가거나 ‘아래’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우리와 같은 3차원 물체가 그곳에 방문한다면, 평평한 표면에 접촉하고 있는 발바닥 부분으로만 그 세계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3차원이라는 아늑한 공간”에 살며 이보다 차원이 더 적은 플랫랜드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2차원 존재가 3차원 세계를 미처 상상하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빠지는 모습에 웃는다. 그러나 차원이 더 많은 세계를 상상하기는 몹시 어렵다. 드루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양자 현실로 오면 (...) 우리도 우리 나름의 플랫랜드에 살고 있다.” (317쪽)

은주)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고 감명 받아 만들어 본 질문이에요. “이 방대한 코스모스에서 우리는 모두 플랫랜더”이고, “그런 우리가 위를 상상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라면(331쪽), 미술인으로서 ‘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해 보고 싶었어요.

미형)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관점이) 많이 바뀌었는데요. 저는 예전에는 ‘위’에 도달하는 것이 상상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실제로 그렇게 살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꿈꾼다고 해도 현실의 삶에서는 어떠한 도전도 용기도 없고, 머리로만 작업으로만 상상할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게 굉장히 소극적인 상상인 것 같고, 실제 삶 속에서 상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일 수 있겠다 싶어요. 예를 들면, 맥락이 좀 다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돈을 많이 안 벌고 돈이 안 되는 미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잖아요. 전 그것 자체가 상상을 실천하는 노력 같은 거예요. 허무맹랑한 세계를 상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상상하는 세계를 실천하는 것.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자신의 삶을 통해 기존의 궤도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것을 일구는 그런 삶들이 있잖아요. 주변에도 있고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요. 저 멀리 우주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요만큼 벗어나는 것, 그게 굉장히 큰 상상력이고 이루어내기 어려운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주의자 같죠?

은주) 공감이 가요. ‘위’를 실제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저의 일화로는 이런 게 있을 것 같아요. 요즘 취미로 작은 들꽃 그림을 그려요. 가볍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리는 연습 같은 걸로 시작한 프로젝트예요. 들꽃 이미지를 모으면서 ‘작업을 해야지’ 하고 모은 게 아니라, 자연이 뿜어내는 에너지나 매력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어서 사진을 엄청 찍고 자연을 관찰했거든요. 나이 들면서(?) 자연에 심취한 걸 수도 있는데, 관찰하고 느낀 결과는 엄청 작은 들꽃에 모든 우주와 조형이 다 들어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이즈도 3호에서 5호 이내로 작게 그리는데, 작은 꽃 이미지 안에 모든 아름다운 형상이 다 있고, 굳이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을 조형의 아름다움이 빼곡하게 있어서 안 그릴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 너무 웃긴가요. 이 그림을 그릴 때나, 들꽃들을 실제 삶에서 만날 때 그 감각이 생경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렇게 엄청난 우주가 발밑에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니. ‘위’라는 게 한 겹만 들춰내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명진) 좋은 이야기들이었어요. 미형 씨도 은주 씨도 뭔가 어른이 된 느낌? (스터디 당시) 일상에 여유가 없어 ‘위’를 보지 못하고 있어서, 나 혼자 아직 질풍노도구나. 나만 사춘기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문영) 저는 단순하게 작업을 두고 생각해서, 나에게 ‘위’를 상상한다는 건 10년 후에 할 작업을 상상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10년 후의 작업이라는 건 지금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거잖아요. 10년 후에 내가 본 적 없는 작업으로 이루어진 나의 개인전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은주) 그것도 좋은 답변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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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내용은 우리의 숱한 대화 중 일부를 작게 떼어 놓은 조각들입니다. 이 대화를 정리하고 보니 과학 서적을 읽으면서도 주로 미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즉 이 여정 자체가 미술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며, 기획자와 작가 모두에게 미술을 통해 ‘미술 바깥’에 있다고 여겼던 세계와 연결되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P.H.P.는 우주와 과학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미술로 이루어진, 미술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