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선 Oksun Kim 

Park Portraits

1 Sep - 3 Oct  2021


둘의 대치, 그리고 함께 있을 뿐인 사랑


다문화가족 - 일반론

 인구통계청의 자료조사, 관련 연구를 참조해보면 가부장제-자본주의의 근간인바 결혼과 출산에 대한 젊은 여성들의 거부감, 동시대 삶의 급격한 변화 등으로 인한 향후 노동 인구의 급격한 감소 해결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주요 당면 과제가 되었다. 더불어 현재 OECD 37개 국가 중 저출산 및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한국 내 결혼의 10%를 국제결혼이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는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외국인의 국내 정착을 위한 다양한 장치, 정책의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뒷받침한다. “국가 간 이주가 상시적이고 일반적인 흐름이 된 상황”에서 정부는 더 이상 기존의 동화주의 일변도 정책을 고수할 수 없게 된 것이고, 선진국의 다문화주의적 정책을 적극 수용할 때가 되었다 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증가한 국제결혼은 주지하다시피 동남아시아/남아시아 출신 이주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2008년 다문화가족 지원법의 제정은 그런 변화를 반영한 정책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다문화가족’이란 신어는 단지 아시아뿐이 아니라 선진 유럽 및 북미, 남미, 아프리카 등 거의 모든 곳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이들과 한국인이 만드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포괄하면서, 초기의 명확한 규정성―“출생 국민과 결혼 이민자 또는 귀화자로 이루어진 가족”―을 초과하면서 느슨해지고 있지만, 다문화가족의 표상이 한국 남성과 아시아 이주 여성의 결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애초에 다문화주의라는 중립적인, 또는 서구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개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문화가족이란 신어는 그러나 이곳의 현실과 맞물리면서 ‘정상’ 가족의 주변부를 부르는, 뭔가 열등한 가족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지각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화주의는 여전히 득세하고, 차이와 다양성의 경험이 부족하거나 인식의 변화를 거부하는 내부자들에게 다문화가족은 문화적/상징적, 경제적 자본을 불충분하게 획득한 소수자 집단을 가리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호칭으로 정착된 것이다. 다문화가족은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엄존한 현장, 외부의 차별로 의해 고립된 사각지대, 그럼에도 어떤 문화의 소통/교환이 일어나고 있는 경계, 새로운 가족관계가 가족주의를 밀어내고 있는 변화와 생성의 장소, 친밀한 관계가 곧 문화적 접변이 일어나는 바깥인 역-공간(liminal space)으로서 어떤 하나의 규정성이나 관점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그런 드넓은 곳임은 분명하다.


다문화가족 내 옥선의 자리

1998년 국적법이 개정되기 전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은 한국에서 거주권과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했고, 가족을 임시 방문하는 권리(방문 동거 비자)만이 주어졌다. 개정 이후 외국인 남편은 결혼하고 2년의 유예기간을 거친 후 일정 자격을 갖춘 경우에 한해 귀화를 신청할 수 있었다. 이후 국적법은 계속 새로운 조항을 첨가하면서 바뀌었고, 국제결혼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해온 듯하다. 2008년 다문화가족법의 시행 이후 다문화가정은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결혼이란 표상에 감춰져 있던 많은 내부의 차이들, 가령 탈북자들이 이룬 가족이나 한국 여성과 외국인 남성의 가족도 포함하는 느슨한 용어로 그 외연을 넓혀갔다. 그전까지는 부계혈통에 기반한 국적법상, 어머니의 나라인 이곳에서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도 아이는 법적으로 한국인이 아니었다. 아이는 한국 여성이 사생아로 자기 호적에 넣지 않는 한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이곳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옥선은 딸 한나가 아버지의 성을 따른 외국인 신분에서 자신의 성을 따른 내국인의 신분으로 바뀐 것이 한나가 유치원 다닐 무렵(아마도 2003년 국적법의 변화를 가리키는 듯하다)이었던 듯하다고 술회한다. 정책 입안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공적 기록에 근거하여 변화를 추적하는 연구자나 활동가들과 달리 당사자, 직접 부딪히고 겪는 이들의 기억과 경험을 말하는 방식일 것이다(자신의 ‘소속’이 달라진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나는 김한나를 ‘인터뷰’해야 할지 모른다. 같은 데서 다른 성으로 불리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나는 내가 아는 기존의 은유나 유비로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런 낯선 경험이나 어려움이 종국에는 한나에게 선물로 변할/변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다. 감히. 가부장제에서 교환되는 여성이 모계제를 함축한 어머니의 성 아래에 놓이는 사건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된, 이 기이한 경험을 나는 뜻밖의 선물, 기회로 감히 해석한다). 

 옥선의 삶과 작업을 요약한다면: 독일인 남편과 결혼하고 연고가 없는 제주도로 25년 전에 내려가고, 제주도민의 육지인에 대한 차별―이것의 역사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하고 또 다루지 않는다 ―을 이중으로 겪었을 것이고, 제주도가 육지인이나 대륙인의 투기에 휩싸이는 현장을 목격했을 것이고, 자신을 닮은 야자수를 발견하고 찍었을 것이고, 자신의 가족처럼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끌어안고 사는 부부의 실내풍경 등등을 찍었다.

 다문화가족이 애초의 규정성을 상실하고 거의 모든 주변부를 포괄하면서 내가 보기에 있으나 마나 한 용어가 되어 간 것처럼, 옥선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변부적 존재나 삶을 지시적 이름이나 제목 없이, 그저 전시를 아우르는 하나의 제목에 의탁해서 가시화된다. 가령 “고은사진미술관 연례기획 중간보고서 2016”란 부제를 달고 있는 사진집 『순수박물관』은 제주도의 ‘선주민’이나 제주의 자생적인 식물이 빠진 제주도, 어쩌다 그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거의 모든 다양한 포지션이 ‘기원/정체성’으로서의 이름이나 제목 없이 무한히 나열되는 편집/구성 방식을 따라 만들어졌다. 제주도가 가까운 열대이기를 열망하는 이들에 의해 강제로 이식되어 제주도의 상징이 된 워싱턴야자 수의 생존이나 번성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기이해 보이듯이(가령 아프리카에서 카리브 해로 강제이주 된 사탕수수농장의 흑인들, 그들의 후예들과 유비시켜도 될까?), 한국으로 경제적 이유로(그러므로 타의로?) 들어온 이주 노동자들이나 지구-행성을 유랑하는 이방인들의 ‘가시화’을 통해 등장한 제주도는, 경제적 이유로 들어가서 작가적 시선으로 발견한 옥선의 제주도일 것이다. 옥선의 사진은 문화인류학적 기록사진이면서 자기 자신이 등장하는 ‘고백적’ 사진이다. 옥선은 내부자로서 ‘우리’를 유출할 뿐 아니라 연구자/보는 자로서 자신이 속한 문화의 집단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왜 자기 자신을 찍은 것이 친밀한, 주관적인 사진의 특이성을 성취하는 데 만족하는 게 아니라 가장 친밀한 사진이 공적인, 역사적인, 객관적인 기록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이고, 자신이 속한 소수자 집단에 대한 정치적 재현, 표상을 거부하는, 즉 소수자의 시각적 ‘정체성’/이미지화를 슬쩍 건너뛰는 ‘미적’ 사진이다. 내부의 이방인, 전 지구적 유랑이나 이주는 옥선에게는 글자 그대로의 삶이고, 그는 늘 자기 이야기를 해왔고, 그 이야기는 친밀한 내부와 낯선 외부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구조화됨으로써 고백과 기록이 뒤섞인 역-공간을 경유해서 들려졌다. 사진은 가장 재현적인 매체라는 점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찍는 행위라는 점에서 근대적 재현 체계가 노정한 가시성의 이데올로기의 볼모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혹은 위반적인 태도를 전담했던 다큐멘터리 기록 사진이 오늘날 식민적, 가부장적, 자본주의적 점유와 전유에 투항하고 말았다는 일반론은 거칠고 성기기는 하지만 경청할만한 사실이다. 보이고 읽히면 이미 분류체계에 들어갔다는 것이고, 동화와 통합에 유리하게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기록 사진은 무엇보다 진짜, ‘있(었)음’의 단서/증거로 제출됨으로써 가짜를 발굴하고 제거하려는 헤게모니적 인식욕에 동원된다. 그럼으로써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미적으로 유희하고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사진작가의 자리를 자꾸 지워버린다. 옥선의 사진은 마치 진짜 사람과 나무, 거기에 그때 있었음을 찍은 것처럼 제시되기에 기록사진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에는 관심이 없는 옥선에게 중요한 것은 “안 어울리는 데 있는 것”을 기록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혼성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것이다. 국제결혼을 한 부부의 실내공간은 둘이 하나라는 이상적인 ‘망상’이나 셋이 되는 물리적인 생산에 바쳐진 무대가 아니라 둘이 끝끝내 둘일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실재적인’ 대치와 협상의 무대로서 재구성된다. 옥선의 야자수는 옥선의 말처럼 “도로변,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들”이다. 육지인이자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이중적 ‘소외’를 투사해서 전유한/구성한 대상들을 하나의 고립이나 둘의 대치를 통해 장면화하는 옥선의 사진은 ‘보는 눈’의 쾌락을 그다지 만족시키지 못한다. 옥선의 사진은 내가 보기에는 밋밋하고 슴슴하고 고요하다. 소수자 공동체를 외부로 유출하는 인류학적/민족지학적 사진이 노출하는 내부의 매력(인식에 기여하는)이라든지, 사적인 것이 노출되었을 때 압도하는 정동 같은 것이 없다. 있는 것은 어떤 얼굴들, 해석 불가능한 상황들, 너무 평이해서 지나쳐도 좋을 것 같은 ‘일상’이다. 그렇게 있다는, 여기에 있다는, 가시적으로 식별되는, 타자에 대한 정보나 보는 자의 미적 쾌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찰자의 개입을 뺀 채로 있(었)음이 찍혔다. “예술을 자처한 것은 아니지만 미술관에 있다”는 옥선의 말은 어느 순간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 작가가 된 것에 대한 어정쩡한, 큰 동요 없는 인정을 고지한다. 

 물론 현재 미술관이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위한 배경, 풍경으로 바뀌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무나 많은 사진들, 누구나 찍는 사진들, 너무나 많은 내용과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서 사실은 텅 빈 사진들, 물화된 스펙타클들, 압도하는 (포르노적) 시선들, 죽은 이미지들, 포식과 탐식 중에 혀는 사라진 미감들, ‘웰메이드’가 잠식한 나라, 마비된 감각들...


한나와 친구들, 야자수

 나는 아직 다문화가정 출신 학생을 만난 경험이 없다(매체와 정보로서야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그러니 사실은 모른다). 다문화가족을 연구한 논문들에서 ‘그들’은 인터뷰이로, 두 문화 사이에서 수치심이나 불안을 느끼는 존재로 재현된다. 나는 영국의 역사적 하위문화를 떠올리며, 그것과 유비 시키며 다문화가정 내 청소년들이 제시할 하위문화를 상상한다. 연구에 따르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학생 수는 감소한다. 그들은 문화의 융합이나 문화로의 적응에 실패했거나 여러 샛길로 이탈하고 있다. 그들이 내부의 이방인이라는 데, 그들이 말하자면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리라는 데는 별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은 듯도 하다. 이질적인 것, 차이를 못 견뎌 하는 우리의 동일성 주의가 그들에게 생채기를 만들고, 그 생채기가 그들을 문제로, 세력으로 이끌 것임은 역사가 알려주는 교훈 혹은 정보이다. 

 옥선이 다문화가정 청소년을 찍은 두 개의 연작 《Riverside Portraits》과 《Park Portraits》는 기록 사진이면서 옥선의 딸 한나가 등장하는 1인칭 고백적 사진이기도 하다. 두 개의 범주가 나란히 함께 작동하는 사진 연작에서 한나가 등장하는 《Riverside Portraits》은 서울 근교에서 3월의 강변을 배경으로 찍은 인물 초상이다. 한나는 다른 여성 청소년들이 대부분 정면으로 찍힌 데 비해 유독 측면으로 등장한다. 가장 가까운 타자인 딸, 그러므로 가장 쉽게 전유할 수 있는 대상을 찍은 사진 중 측면 사진을 선택, 전시함으로써 옥선은 손쉬운 동일시,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을 가진, 사랑하는 타자와의 거리, 긴장을 표지한다. 가족은, 부모와 아이는 가장 서로를 모르지만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친밀한 타인들이다. 엄마의 사진집에 가족사진도 아닌 ‘집단적’ 인물 사진에 어떤 표상이나 이미지로 등장하는 딸. 국제결혼 당사자와 2세들 사이의 거리는 주관적인 사진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객관적인 사진으로 전치되어 있는 한나의 사진의 구성방식, 혹은 여러 사진 중 선별된 이 사진에 의해 신중하게 보유된다. 나는 이런 사진을 그래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 것임을, 그 둘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끝없이 발견하면서 그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나의 친구들, 혹은 건너 건너 알게 된 다문화가족 청소년들이 겨울과 봄, 죽은 풀과 돋아나는 풀들이 뒤섞인 강변에 앉아 있다. 자신을 포함한 다문화가족 부부를 옥선은 두 문화가 물건들을 통해 뒤섞인 채 가시화되는 실내에서 찍었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바깥에서, 과도기적인, 쓸쓸하면서 황량하면서 어떤 삶의 기운이 서서히 번져나가는 3월 강변에서 찍었다. 옥선의 해석, 구성 안으로 아이들이 배치되었다. 아이들은 인스타용 사진, 혹은 그보다 더 멋진 인스타용 사진을 사진작가에게 원했을지 모르지만, 옥선은 아이들이 ‘원하는’ 구도, 표정, 자세가 아이들의 ‘겉’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마침내 이렇게 빈, 뻣뻣한, 고요한, 죽은 풀과 돋아나는 풀 사이에 있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대상으로 변한 아이들을 찍었다. 눈여겨 자세히 보아도 우리랑 별로 다를 게 없는, 사진작가가 포착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보기엔 별 게 없는 듯한 사진 같고,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라고 작가에게 물어보기도 좀 애매한 사진. 마치 너무 많은 말 때문에 사진은 사라진 사진(스투디움?)은 아니려는 것 같고, 다문화가족 청소년이란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아젠다에서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것 같고, 3월 강변의 풍경을 청소년기의 알레고리로 전치한 것 같고,..... 말 없는 제스쳐나 마침내 말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만이 비로소 말을 할 자격이 있다면, 텅 빈말이나 이미지만이 말한다는 게 맞다면, 이렇듯 고립과 비우기와 노출을 통해 온전히 옥선의 대상으로 바뀌고,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원하는 정보나 감정, 기대와 불안에서 멀어진 채로, 오직 옥선이 꾸민 무대에 있었음이 증거로 남은 아이들의 이미지적/표면적/사진적 차이를, 차이의 나열을 보고 들을 귀나 눈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푸코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놓고 말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옥선의 사진, 옥선이 내부의 외부자로서 유출하는 다문화가족의 상태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게 된다. 

 

 마그리트는 유사(ressemblance)에서 상사(similitude)를 분리해내고, 후자를 전자와 반대로 작용하게 하는 것 같다. 유사에게는 <주인(patron)>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 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되풀이에 쓰이며 되풀이는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 유사는 전범(modèle)에 따라 정돈되면서, 또한 그 전범을 다시 이끌고 가 인정시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부터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모의(simulacre)를 순환시킨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미셸 푸코, 김현 옮김, 민음사, 1995, pp 72~73)  


 상사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비슷한 것들이 무한히 되풀이되면서 근원/주인/전범 없이 떠도는 유랑하는 이미지들, 기표들, 사본들의 장소/현장을 말한다. 상사는 집에 도착하지 않을 것이고(《No Direction Home》, 2010년 사진 연작 제목), 비슷할 뿐 닮지는 않은 이미지들, 기호들이 재생하는 가짜/모의에 충실한 것이다. 

 옥선은 대만의 가오슝 아트 레지던시에 있을 때 그곳의 다문화가족 청소년들을 섭외해서 자신의 분신이자 알레고리적 표상이라 할 수 있을 야자수를 배경으로 찍었다. 중국과의 외교적 교류가 재개되고 전 지구적 이주의 일환으로서 주변국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우리보다 10년 정도 먼저 다문화가족이 급증한 대만에서 옥선은 한국과 비슷한 상황, 비슷한 얼굴을 보았다. 다른 곳에서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역사와 타자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를 알아보는 것, 그것을 나의 가장 친밀한 이방인인 딸의 반복이자 확장으로 배치하는 것, 이들이 앞으로 일궈낼 공동체나 내부는 설치하지 않은 채 대신에 작가 자신의 분신인 야자수 앞에 슬쩍 데려다 놓는 것, 그들은 모른 채 들어간 어떤 ‘내부’가 신중한 의도하게 배치되었다는 것, 인류학적 사진인 듯 그러나 사실은 어떤 정서가 배어 있다는 것, 이걸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우기는 것에 진배없다는 것, 아이들은 홀로 고립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둘이라는 것, 옥선의 둘은 곧장 융합으로 수렴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게 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면 설명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여성-엄마-작가 옥선이 연출한 모계장적 사진의 형식 같다는 과잉의 해석을 밀어 넣는 것.    

 그리고 아이들은 등장하지 않는, 야자수만 나오는 사진. 종교 의례에 사용되었던 종교화인 삼면화 형식을 차용해서 함께 걸린 채, 파노라마 사진인 척하는 사진. 파노라마적 사진이나 전체의 표상에 대해 들쭉날쭉한 모서리들, 이음매들을 보여주는 세 개의 사진으로 대적하는 것. 융합과 동화에 계속 말을 걸고 대거리하는 것. 위계화 된 재현에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대드는 것. 


글. 양효실(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