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선 Oksun Kim 

Park Portraits

1 Sep - 3 Oct  2021


얼굴로, 그 얼굴, 얼굴¹ 

문혜진 (미술비평)


1. 상업화랑에서 처음 선보이는 김옥선의 신작 《Park Portraits》(2019-20) 연작과 《Riverside Portraits》(2019-20) 연작은 각각 대만과 한국의 다문화 가정의 2세들을 찍은 인물 사진 작업이다. 이 연작들은 김옥선의 기존 작업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작가는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이 《No Direction Home》(2009-11)과 《Berlin Portraits》(2017--2019)를 잇는 인물 사진 3부작의 완성이라고 말했다.² 그간 김옥선의 작업의 거개가 인물이 중심이 된 사진임을 생각할 때 혹자는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김옥선의 모든 작업은 인물 사진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제주의 나무를 찍은 《The Shining Things》(2011-14)를 제외하면 실상 김옥선의 거의 모든 사진의 피사체가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The Shining Things》의 경우도 나무가 정확히 인물을 찍는 방식과 동일하게 촬영되었음(풍경과 피사체를 분리하여 중심이 되는 피사체를 중앙에 놓고 각 피사체의 개성과 표정을 강조해 되도록 전체를 촬영)을 감안하면, 김옥선의 작업이 원론적으로 인물에 입각한 사진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작업들을 인물 사진이라고 특별히 거론한 것일까?


2. 어쩌면 《Berlin Portraits》와 《Park Portraits》라는 제목이 일종의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베를린 초상’과 ‘공원 초상’이라는 이름처럼 《No Direction Home》, 《Berlin Portraits》, 《Park Portraits》, 《Riverside Portraits》는 인물이 사진의 7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작업들이다. 국제 결혼 커플을 찍은 《Happy Together》(2002-04)나 제주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Hamel’s Boat》(2006-08)는 인물 못지않게 공간이 중요했다. 이질적인 문화 차이를 드러내는 각종 소품들, 인물의 이국적 외모와 상충하는 자연풍광이나 건물은 피사체의 타자성을 드러내는 지표로 인물과 동등한 비중을 점유하고 있었다. 《No Direction Home》과 《Berlin Portraits》에서는 인물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배경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 작업에서도 여전히 배경의 세부는 중요하다. 이를테면 《No Direction Home》연작에 등장하는 창호지 문이나 전통 문양의 목가구는 남아시아인이나 서양인의 외양을 한 피사체의 이방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다. 하지만 인물의 비중이 커지면서 사진의 무게중심은 초상에 가까워진다. 배경은 중심 피사체인 인물을 보조해주는 주변부이지 인물을 압도하거나 인물과 경쟁하지는 않는다. 

 신작 《Park Portraits》과 《Riverside Portraits》역시 인물이 중심에 놓인다. 다만 이 연작에서 공간은 작품의 해독에 참여하기보다 문자 그대로 배경으로 완전히 물러난다. 문화적 지표가 제거된 채 장소를 특정할 수 없이 공간이 모호하게 제시되면서 인물의 중요도는 더 커진다. 특히 《Riverside Portraits》의 경우 자연은 한국이라는 기호를 전달하기보다 막연히 황량한 정서를 자아내는 요소로서 사진의 이면에 스며들어 추상적인 분위기(atmosphere)로만 작동한다. 가오슝과 타이난에서 촬영된 《Park Portraits》에서도 배경이 피사체와 관련된 지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동일하다. 여기서의 자연은 《Hamel’s Boat》에서처럼 정착도 여행도 아닌 임시 거주자로서 피사체의 모호한 상태를 드러나는 장소적 기호가 아니다. 하지만 자연이 완전히 배경으로 물러난 《Riverside Portraits》에 비하면, 식물은 반쯤은 배경이고 반쯤은 피사체인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 <ppm_xkz0613>(2020)나 <ppk_lht8363>(2019)처럼 배경에 가까운 경우도 있지만 <ppk_wcc1051>(2019)나 <ppk_ccs6718>(2019)처럼 인물과 식물이 절반 정도씩 비중을 차지하고 함께 찍힌 작업도 있다. 이런 경우 식물은 배경이라기보다 피사체로서 인물과 함께 일부 공간을 공유하며 같이 제시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Park Portraits》는 《No Direction Home》에서 제시된 경계인으로서의 인물 사진과 《The Shining Things》에서 실험한 대상으로서의 나무 사진을 결합했다고도 볼 수 있다. 《The Shining Things》의 종려나무가 외래종이지만 제주의 자연에 완전히 정착해 완전한 외부도 아니고 내부도 아닌 모호한 중간적 타자성을 단독 피사체로서 드러내고 있다면, 《Park Portraits》의 아열대 식물들은 인물에 비해서는 비중이 약하지만 대만에서 나고 자란 혼혈로 그 역시 중간인인 다문화 청소년들의 이국성을 지원하며 사물로서 인물 옆에 자리한다. 


3. 두 신작은 소재 외에도 형식적으로 조금 달라졌다. 우선 인물을 포착하는 프레이밍이 변했다. 《No Direction Home》과 《Berlin Portraits》의 경우 인물은 전신 샷이 기본이었다. 포즈가 균일한 《Berlin Portraits》는 모두가 전신 사진이고 《No Direction Home》의 경우에도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인물은 거의 몸 전체가 다 나오게 촬영되었다. 전신을 모두 촬영하는 방식은 딥 포커스처럼 촬영자의 의도를 억제하고 개입 없이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어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판단할 수 있게 정보를 많이 제공한다. 이 경우 대상에 대한 거리감이 확보되어 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인상이 강화된다. 반면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의 경우 카메라는 대상에 훨씬 다가간다. <ppk_cnt9898>(2019)처럼 풀 샷도 간혹 있지만, 다수의 사진은 3/4이나 1/2 등 몸의 일부를 근접 촬영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멀리서 피사체를 건조하게 바라보기보다 피사체의 눈높이에서 몸을 낮춰 더 다가가는 태도를 보인다. 앉아 있는 자세가 많은 것도 카메라의 시선을 낮추고 보는 이가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다. 한편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빛의 처리다. 같은 야외 촬영이라도 흐린 날을 골라 조도를 균일하게 조절한 《Hamel’s Boat》나 《The Shining Things》와 비교하면, 《Park Portraits》는 상당히 다채로운 톤을 보여준다. 숲에서 찍어서 어둡게 나온 <ppk_ccs6718>, 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조금 밝은 톤의 <ppm_jlg1577>(2020), 흐린 날 찍은 회색 톤인 <ppk_lht8363>, 햇빛을 직접 받아 부분 부분 얼룩진 음영을 지닌 <ppk_chn8869>의 다양함은 이전에 비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한강변에서 찍은 《Riverside Portraits》는 상대적으로 톤이 균질하기는 하나 이 경우 역시 자세히 보면 상대적으로 밝은 사진과 어두운 사진이 감지된다. <pps_jeh4648>는 전자의 사례고 <pps_khn6718>는 후자의 사례다. 이런 변화는 연작의 통일성을 맞추려는 작가의 개입을 줄이고 그때그때의 상황과 피사체에 맞게 사진을 좀 더 열어놓은 인상을 준다.


4. 그렇다면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피사체와의 거리를 좁힌 것인가? 이 지점은 가장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과거 작업에서도 피사체와의 거리는 김옥선 작업에서 가장 복합적이고도 미묘한 문제였다. 일차적으로 김옥선의 모든 피사체는 작가의 삶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대상이다. 30대 여성들의 벗은 몸을 통해 사회 통념에 굴하지 않는 주체적 자의식을 드러낸 초기작 《Woman in a Room》(1995-1996), 국제결혼 커플의 문화 차이와 갈등을 드러낸 《Happy Together》는 국제결혼을 한 교육받은 30대 여성으로서 작가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소재를 대상으로 했다. 《Happy Together》에서 관객을 직시하는 쪽이 언제나 여성인 것은 작가가 국제결혼 커플 중 아내에 이입해 여성을 사진의 주인공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이후 작업의 주제는 자아로부터 타자나 사물로 확대되었지만, 작가의 구체적인 실제 삶에서 소재가 발생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했다. 제주에 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Hamel’s Boat》는 이방인으로 제주에 살고 있는 남편을 이해해보려는 취지로 시작되었고, 《The Shining Things》는 타자성을 거주지의 외래종인 종려나무와 야자수에서 발견한 것이며, 《Berlin Portraits》는 한국인이면서 타국에서 반평생을 보낸 파독 간호사 할머니들을 통해 경계인의 삶에 대한 동질감과 자신보다 오래 국제결혼을 지속한 선배 여성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것이다.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 역시 작가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다. 한국과 대만의 십대 혼혈 청소년들을 촬영한 이 작업은 비슷한 나이가 된 작가의 딸을 통해 자신과는 또 다른 경계인의 삶을 사는/살아갈 청년들을 주목하게 된 데서 출발했다. 

 이 모든 작업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삶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피사체와 모종의 거리를 유지한다. 피사체에 감정 이입해 동일시하기보다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한 채 일정 부분 관찰자로 남아 있는 것은 김옥선 사진 전반에 나타나는 특유의 면모다. 작가의 자아와 가장 가깝던 《Happy Together》의 경우에도 피사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동질감만은 아니다. 무표정한 인물의 얼굴, 감정이 절제되고 정적인 상황 연출, 차분하게 가라앉은 사진의 톤은 대상을 끌어안거나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관찰자의 태도를 지원한다. 그런 점에서 김옥선의 태도는 낸 골딘(Nan Goldin)보다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실상 김옥선과 피사체의 관계는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작가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대상을 찍는다는 점에서는 낸 골딘을 떠올릴 수 있지만, 타인을 찍었든 자신을 찍었든 모두 일종의 자화상인 골딘의 사적 친밀감은 김옥선에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관계없는 타자지만 일정 부분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완전히 동조하지는 못하고 거리감을 유지하는 아버스의 태도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하지만 끝내 관찰자로 남는 김옥선과 접점을 지닌다. 동질감에서 출발하되 거리감을 유지하는 모호한 중간성은 사진의 연출에서도 드러난다. 《Hamel’s Boat》나 《No Direction Home》에서 피사체의 의상이나 포즈는 해당 인물이 직접 선택한 것으로 피사체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작가의 연출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작가는 피사체를 자연스럽게 놓아두기는 하지만 가끔 원하는 장면이 나오도록 포즈를 지시하기도 하고 분위기를 유도하기도 하며 물 밑에서 조용히 상황을 이끌고 통제한다. 작가든 해당 인물이든 원하는 상황을 꾸미되 인물을 왜곡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방식은 연출 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진 사이의 태도다. 이 기묘한 중간성은 신작에도 반영된다. 언급했듯 사진은 피사체를 가까이 찍어서 관객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좁혔고, 조도를 통일하지 않아 형식을 조율한 이전 작업보다 외견상 더 풀어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혼혈 청소년들을 여전히 모르겠고 다가가기 어렵다. 그것은 피사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던 소품들이 제거된 채 인물의 얼굴만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집안의 인테리어와 의상을 통해 인물의 취향과 성격, 직업을 유추할 수 있었던 《No Direction Home》이나 《Berlin Portraits》와 달리, 관객은 혼혈 청소년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일절 짐작할 수 없다. 캡션에 이니셜 일부와 피사체와 관련된 숫자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은 인물 개인의 배경을 짐작하기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추상적 언표일 뿐이다. 결국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이 청소년의 남들과 다른/다를 경험을 암시하는 혼혈의 흔적이 배인 얼굴뿐이다.     


5. 이제 질문은 이번 신작이 초상 사진인가로 겨누어져야 한다.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는 인물 사진임이 분명하다. 사진에서 인물 외의 다른 요소를 최소화하고 이전보다 인물을 더 강조해 찍은 사진이니 분류하자면 초상 사진이 맞다. 그런데 이 사진들은 누구를 보여주고 있는가? 물리적으로는 ‘xenchang’이나 ‘hena’라는 이름을 지닌 실존하는 어떤 인물이 표면에 존재하고 있지만, 관객은 사진을 보기 전이나 후나 ‘xenchang’과 ‘hena’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세부가 잘 드러나게 찍고 대형으로 인화해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자세하게 얼굴을 보고 있지만, 이 아이가 혼혈인 것 같다는 점 외에 인물은 여전히 가려져 있다. 이런 식의 초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토마스 루프(Thomas Ruff)의 《Portraits》(1981-85)를 감상하는 경험과 유사할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는 이보다 더 잘 볼 수 없으나 볼 수 있는 것은 표면뿐이니 말이다.³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가 보여주는 것은 각자 다른 배경과 사연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인물이 아니다. 대신 떠오르는 것은 ‘혼혈’이라는 추상적이고 집합적인 모호한 개념이다. 민족이나 인종처럼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유효하고 여전히 생활 세계를 지배하지만, 실체를 밝히려고 할수록 명료한 구분이 불가능하고 갈수록 종잡을 수 없어지는 기이한 개념 말이다. 

 앞서 피사체와의 가깝고도 먼 김옥선 특유의 중간적인 거리감에 대해 언급했지만,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독특한 대상성도 김옥선 작업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특징이다. 김옥선 사진의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과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연작에 흡수되면서 개인으로서의 구체성을 잃고 추상적인 타자성을 지시하는 한 요소로 기능하게 된다. 연작이 반복되며 개인이 휘발된 자리에, ‘제주에 사는 이방인’, ‘파독 간호사’, ‘국제 결혼 커플’, ‘혼혈 청소년’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이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김옥선 사진은 복수성이 중요하며 그렇기에 연작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유형학과도 맞닿는다. 다만 김옥선의 타자성 연작은 베허 부부(Hilla and Bernd Becher)의 유형학보다는 형식적으로 자유롭고⁴,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의 작업처럼 전체를 아우르려는 아카이브적 욕망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유형으로 규정하기에는 느슨하고 개별적이지만, 개인이라 말하기에는 추상적인 이 모호함이 김옥선 사진의 중요한 차별성이다. 《Park Portraits》와 《Riverside Portraits》에서 보편성과 구체성 사이에서 진동하는 김옥선 특유의 모호함은 한층 강화된다. 이미 취향과 성격이 형성된 성인과 달리 아직 정체성이 완전히 성립되지 않아 어디에 속하는지 자신이 누군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청소년 특유의 불안정함은 신작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충혈된 눈이나 여드름 자국, 서툰 화장을 샅샅이 바라보면서도 이 아이들에 대해 짐작할 수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얼굴이다.


6. 혼혈이라는 타자성은 무엇인가? 이 청소년들의 얼굴 자체가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혼혈의 애매한 실체를 증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꺼운 입술과 뭉툭한 코, 커다란 눈처럼 동양인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외양으로 혼성을 짐작할 수 있는 얼굴도 있지만, 외모만으로는 전혀 혼혈인지 알 수 없는 얼굴도 있다. 이들이 혼혈이라는 사실은 연작의 다른 얼굴들을 보고서야 추론 가능하다. 오직 보이는 것은 얼굴뿐인데 얼굴로도 정체성을 짐작할 수 없다면 우리가 보는 얼굴은 실상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텅 빈 기호다. 혼혈의 실체 역시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해 순혈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혼혈도 실상 의미가 없는 구분이다. 타자성 역시 동일하다. 자아는 타자 없이 성립되지 못하며 타자는 나와의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상대적이고 임시적인 개념이다. “그녀를 보자 당신은 그녀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어떤 것이었을지 당신은 알게 된다. 당신은 비스듬히 눕고, 당신은 깜박 졸고, 당신은 넘어지고, 당신은 전에 본 적이 있는 것들을 다시 눈앞에 본다.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반복된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 당신은 그녀이다. 그녀는 당신을 말한다. 당신은 그녀를 말한다. 그녀는 말하지 못한다.” 우리는 펭링, 후안, 수진, 한나를 본다. 우리는 그들이 아니지만 동시에 그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만 그들을 알지 못한다. 얼굴들은 모두 다르지만 동시에 같기도 하다. 이 얼굴은 무엇을 바라보는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나? 


글. 문혜진(미술비평가)



1 차학경의 작품 DICTEE(1982)의 한 구절인 "IN NOMINE LE NOM NOMINE"(이름으로 그 이름 이름)에서 착안해 지었다. 차학경(김경년 역). 『딕테』(서울: 어문각, 2004), 31쪽. 

2 김옥선 인터뷰, 2021년 7월 23일.

3 물론 김옥선은 인물을 사물로 대하지 않으니 피사체와의 거리 설정에서 루프와 전연 다르다. 

4 한 연작 내에서 인물의 포즈와 프레이밍의 다양성은 김옥선 작업 일반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5  차학경(김경년 역), 『딕테』 (서울: 어문각, 2004),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