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승욱, 오세린, 일상의실천, 정용택, 차지량, 최황, 한정림, CMYK

박원순 개인전 Park Wonsoon Solo Exhibition

8 - 24 Mar. 2019

Eulji-ro

서울의 어떤 풍경이 사라지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이던 날, 미술이 미술 안에서 머물 때 가장 재미가 없다는 문장을 말하던 날, 그러한 문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만나던 날. 2019년 1월은 서울시의 도시재생 사업과 재개발 사업들의 문제들이 또다시 가시화되던 시기였고, 그러한 현상에 반응한 예술가들이 을지로에 모였다. 을지로는 예술가들에게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지역이었고, 문제의 반복과 진행 과정의 절망적인 상황에 분개했다. 모인 사람들은 예술가로서의 행동을 도모하기 위해 매주 만나서 각자의 시선과 방법을 고민하며 전시를 준비해갔다. 나는 작가로서 이곳에서 전시코디네이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나는 전시 준비가 마무리된 오픈 전날의 작품들을 천천히 본다. 한 명의 설치작가는 높은 주거지역에서 자신이 거주했던 방을 촬영한 사진과 참여했던 행사가 끝난 공간의 사진을 걸었다. 뜯겨진 벽지가 뭉쳐진 공간과 대규모 문화예술의 행사가 끝나 쓰레기만 놓인 공간들을 창문의 빛이 비추고 있다. 이사와 철거라는 상황에 놓인 공간은 조금은 높거나 혹은 낮게 걸린 낡은 액자 안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전시장의 새로운 빛에 반사된 작가의 표정을 본 걸지도 모르겠다.


한 명의 공예작가는 원재료가 갖는 귀함과 그것을 연마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을 잘 알고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빛나는 정도에 따라 그 귀함이 꼭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귤과 빛을 받지 못하는 색이 변한 귤의 조각들은 같은 곳에 모여 있지 않았다. 점점 어떤 사람들은 도시에서 보이지 않고 있다. 서울에는 어떤 사람이 살아야 하는 걸까?

사라지는 점포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사연과 손글씨를 수집한 작가도 있었다. 사라지는 동네의 대화와 언어를 수집한 작가는 글씨들을 그대로 한곳에 옮기는 수행을 한 뒤 모두 지우는 퍼포먼스를 전시 기간 동안 진행한다.

디자인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작가들은 그동안 클라이언트에 맞춘 업무 외에 다른 폴더를 만들어 관심사를 축적한 듯했다. 이들은 도시의 운영시스템과 부산물이 미끄러지며 생산해낸 많은 양의 디자인을 밈   으로 소환시켜 관객 스스로 프로파간다를 만들 수 있게 돕는다.

특별한 사람을 위한 겨울나기 상자를 만든 작가들도 있었다. 그 상자를 받은 특별한 사람을 떠올려본다. 그는 정말 겨울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그가 서울의 여름이나 겨울 혹은 미세먼지를 체험하는 일은 일상과 먼 계층적 거리감을 동반한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을 포함한 계층적 거리감을 갖고 있는 대상의 언어는 소통 공감을 목적하고 있지만, 텅 빈 본심을 드러내곤 한다.

영상 작품을 제작한 두 명의 작가는 하나의 TV에서 각자의 시선이 담긴 영상이 서로 한 번씩 나오며 반복된다. 개발지역을 맴도는 시선과 개발지역을 조망하는 시선은 개인의 권력과 갈증이 향하는 곳을 보여준다. 이 권력과 갈증은 같은 공간에 머무를 수 있지만, 서로 만날 수 없다. 시선의 높이 때문일 것이다. 두 명의 목소리가 전시장에 들려지며 각자의 문장을 말하지만, 그들은 서로 작품을 통해 대화할 수 없다. 이 둘은 언젠가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다양한 작가들이 모여 《박원순 개인전》이라는 하나의 전시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전시코디네이터를 수행하며 설정한 목표가 있었다. 참여하는 작가들이 작가 박원순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자처했듯, 나 역시 작가들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참여하는 사람이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 전시를 만들고 싶은 것이 큰 이유였다. 우리는 서로의 어시스턴트였고,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매주 한 번씩 만나며 특별한 개인이 되었다. 그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2008년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되던 때, 나는 공사장에 위장 취업하여 그곳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며 야구를 하는 작품을 만들었었다. 어쩌면 그 작품으로 나는 예술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시 만났던 현장의 사람들은 관객이 되어 작품 속 자신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혹은 다른 사람에게는 더 길게, 매번 절망적 상황은 반복되어 왔다. 심지어 절망의 편은 매뉴얼이 생기고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이곳에 머물고 있다. 왜일까? 이곳에서 잘 있어야 이곳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야말로 주체적인 개인을 만날 수 있으니까. 예술가, 관객, 시민, 시장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움직이는 당신을 만난다. 나는 이곳에서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