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량  HAK RYANG KIM

바다와 나비

 19 Feb - 8 Mar. 2020

Eulji-ro

이태 전 신림동 산수문화에서 정재호씨와 2인전을 하면서 북한 잠수함을 그렸다. 이번 작업도 그때의 눈과 마음으로 계속하는 것이다. 거기서 마음이 떠나지지를 않으니 어떡하랴, 한동안은 쥐켜 살아야지, 도리 없다. 이번에도 초상화 그리는 자세로 성의껏 그렸다.


강릉 안인진 근처 바닷가에 ‘전시’되어 있는 북한 잠수함은 ‘적의 주검’임이 분명하고, 그 죽음의 흔적은 좌절, 실패, 절망, 불능 같은 것을 의미하겠지만, 자꾸 가서 또 볼수록 잠수함과 그 내부를 화려·장엄하게 채우고 있는 온갖 기계설비와 장비들은 거울과 같은 것이 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것은 저것을 비추는 거울이다. 적의 죽음과 나의 삶이 다를 바가 무엇이랴. 어떤 역사도 피아彼我가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잠수함을 그리는 일은 나를 그리는 일이고, 그것은 자화상이다.


그 숱한 설비·장비는 정교하게 서로 연결되어 제각각 특별한 배역을 맡아서 일한다. 어디서건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잠수함 전체의 기능을 위협하게 된다. 잠수함 치고는 몹시 작은 것이지만, 내가 그것에 매혹되는 까닭은 지극히 복잡다단하게 이루어지는 장비·설비의 네크워크와 커뮤니케이션 구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배관이나 각종 개폐장치들이 기능별로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그 자체로 황홀한 단청丹靑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면 그게 누구 것이고 뭐하는 물건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만 넋을 놓고 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는 몹시 힘들었다. 몹시 지겹기도 했고, 아주 신나는 순간도 많았다. 정재호씨가 이렇게 위로했다―“형, 그 지겨움과 잘 싸우세요.” 나 자신을 무엇엔가 투여하다보니 힘이 든다. 당연한 일이지만, 몹시 힘들다. 힘을 들여야 누군가와/무엇인가와 만나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우친다. 모든 일과 가족에게서 도망치다시피한 채, 시쳇말로 거의 ‘잠수’하며 공을 들여 보니 알겠다. 힘을 들인다는 것은 나를 상대와 나눈다는 뜻인 것 같다.


전시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일이고, 작품 전체에 어떤 분위기를 불어넣는 일이며, 작가 스스로에게는 작업의 자세를 가다듬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그런 일이다. 상업화랑의 기묘한 공간 됨됨이가 이번 작업과 퍽 어울려 마음에 든다. 본래의 ㄱ자 공간에 더해, 새로 마련된 윗층 전시장으로 오르는 층계실까지 활용했다.


잠수함도 어딘가로 가는 길을 이끄는 매체이다. 전시 초입에, 지난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릉 바닷가에서, 자신의 길도 언어도 문법도 방향도 목표도 다 버린 빈 몸으로 발견된 북한 잠수함(<정물>)을 걸고, 그 곁에는, 세월이 다 무엇이냐는 듯 차라리 심해深海를 무심히 헤엄치는 잠수함을 배치했다. 동선 전반부의 긴 목탄그림(<강산무진: 그대에게 가는 길>)과 후반부의 긴 컬러사진 (<강산무진: 꽃상여>)은 말하자면 길에 관한 것이다. 그 두 점은 18세기 후반 이인문(1745-1821)이 그려 남긴 <강산무진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동선 중반부, 전시장 안쪽에는 잠수함 설비·장비를 그린 <자화상 연작>을 배치했다. 층계실, 동선 마지막에는 <자화상> 한 점과, 가뭇한 우주를 기약 없이 세월처럼 흘러가는 잠수함을 희미하게 그려 넣은 <그대에게 가는 길>을 걸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층계실, 그 양쪽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걸린 채 자화상 한 점과 잠수함은 그렇게 서로 점선처럼 마주보고 있다.


모든 길은 무덤으로 향하지만, 무덤에서 모든 길은 비롯한다. 이래저래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愁心도 깊다.


* 전시 제목은 근대시인 김기림(1908~?)의 시 「바다와 나비」(『女性』 4권 4호, 1939. 4 발표)를 빌려 쓴 것이다.